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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943 / 쌍림동
* 명칭 쌍림동 이명칭
개요 쌍림동(雙林洞)은 광희동사거리에서 퇴계로5가교차로에 이르는 퇴계로 남·북쪽에 위치한다. 쌍림동의 동명은 마을 입구에 도적을 경비하던 한 쌍의 이문(里門)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쌍리문동(雙里門洞)이라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해서 쌍림동으로 되었다.
설명 광희동사거리에서 퇴계로5가교차로에 이르는 퇴계로 남·북쪽에 위치한 쌍림동(雙林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병목정(竝木町)이라 불리다가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쌍림동이 되었다. 쌍림동의 동명은 마을 입구에 도적을 경비하던 한 쌍의 이문(里門)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쌍리문동(雙里門洞)이라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해서 쌍림동으로 되었는데 쌍이문골·쌍이뭇골·쌍문동·쌍리라고도 하였다. 쌍림동의 유래가 된 이문(里門)의 설치는 조선 세조 때 “경성의 각 부락에 이문을 만들어 세우라”는 전지를 한성부에 보내면서부터 비롯된다. 병조(兵曹)의 계청(啓請, 왕에게 아뢰어 청하는 일을 이르던 말)으로 각 이문 안의 인구를 참작하여 10호 이하는 매일 밤 2명씩, 20호 이하는 3명 씩, 30호 이하는 4명씩, 그 이상은 매일 밤 5~6명씩 부락민이 나와서 이문에서 숙직(宿直)을 하였으며 외방(外方)에도 민가가 조밀한 곳이면 이문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성종 때에도 도적을 경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법으로 금했던 사치스러운 잔치나 소음이 발생할 때에도 이문의 숙직자가 단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서울에 남아있던 100여개의 이문은 거의 소실당한 채 복구되지 못하였고 순종·헌종 때에는 종로구 공평동에 있는 이문 터와, 이곳 쌍림동의 이문 터 그리고 몇 곳이 동명으로만 남았을 뿐 서울의 이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890년까지 이곳에 풀무집들이 많아 번창했던 까닭에 풀무재[治峴]로 불렀는데 이는 남산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생긴 고개로 현재는 깎아져 볼 수 없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즐비하게 대장간들이 늘어서 있어서 이 고개를 풀무고개 혹은 대장간고개라고도 하였다. 이 풀무고개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는 100여 곳의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조선 초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 1351~1419)가 살았다. 이 집에는 모양이 마치 말구유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를 구유바위, 한자로 조암(槽岩)이라 하였다. 그래서 남재의 집을 조암루(槽岩樓)라고 불렀다.
역사정보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속함 일제강점기 병목정(竝木町) 1946 쌍림동 동명제정
시대분류 현대/1946(동명제정)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쌍림동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쌍림동
시작일(발생일) 1946년(동명제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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