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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937 / 저동1가
* 명칭 저동1가 이명칭
개요 저동1가(苧洞一街)는 명동성당교차로를 중심으로 삼일대로를 따라 위치한다. 저동이라는 동명은 이곳에 조선시대 모시를 취급하는 상점인 저포전(苧布廛)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남대문세무서, 평화빌딩, 중앙빌딩, 명동성당 부속건물 등이 위치하고 있다.
설명 명동성당교차로를 중심으로 삼일대로를 따라 위치한 저동1가(苧洞一街)는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속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영락정1정목(永樂町一丁目)으로 불리다가 1946년 10얼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저동1가로 되었다. 저동이라는 동명은 이곳에 조선시대 모시를 취급하는 상점인 저포전(苧布廛)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예전부터 저전골·저전동(苧廛洞)으로 불리던 것이 저동으로 약칭되었다. 저포전은 조선시대 한성부에 설치되었던 육의전(六矣廛) 중의 하나였다. 현재 남대문세무서 자리에는 양향청(糧餉廳)이 있었다. 양향청은 1594년(선조 27)에 훈련도감과 같이 설치되었는데 훈련도감에 조달되는 군량·군복·무기·깃발 등의 각종물품을 공급하고 재정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양향청은 1884년에 폐지된 후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전매국(專賣局) 인쇄부(印刷部)로 사용되었다가, 다시 경성세무서(京城稅務署)에서 사용하면서 이후로 세무서 자리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박문국(博文局)이 있었다. 박문국은 1883년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건의로 당시 총리위문(總理衛門)의 산하기구로 신식인쇄기를 설치하면서 출발하였다. 박문국은 인쇄·출판기관으로 1883년 10월 30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제1호를 창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갑신정변이 실패함에 따라 수구파 일부 군중들이 박문국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는 바람에 인쇄시설이 불타서 신문간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성순보는 14개월 만에 폐간되었고 박문국도 폐지되었다. 저동1가는 예전 죽동(竹洞)과 더불어 남촌에 있는 좋은 집터라는 의미로 ‘저동죽서(苧東竹西)’라는 말이 전해 내려올 만큼 명문고관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충헌(鄭忠憲) 형제, 이순무(李巡撫), 박지수(朴支壽)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이웃하여 살면서 오랫동안 부귀를 누려왔던 사람들이며 왕실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세력 또한 대단하였다. 이 일대는 1972년 10월유신(十月維新) 이후 민주화의 열망이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표출되던 곳으로 당시 학생·시민·전경이 최루탄과 함께 뒤엉키던 지역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남대문세무서, 평화빌딩, 중앙빌딩, 명동성당 부속건물 등이 위치하고 있다.
역사정보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속함 일제강점기 영락정1정목(永樂町一丁目) 1946 저동1가(苧洞一街) 동명제정
시대분류 현대/1946(동명제정)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1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1가
시작일(발생일) 1946년(동명제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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