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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933 / 수하동
* 명칭 수하동 이명칭
개요 수하동(水下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대평방(大平坊)에 속하던 곳으로 삼각동 남동쪽, 남대문로10길과 을지로7길 사이에 있다. 수하동의 동명은 이곳이 남산에서 발원한 창동천(倉洞川) 아래쪽에 있어 ‘물아랫골’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고친 데서 유래되었다.
설명 삼각동 남동쪽, 남대문로10길과 을지로7길 사이에 위치한 수하동(水下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대평방(大平坊)에 속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수하정(水下町)이라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중구 수하동이 되었다. 수하동이라는 동명은 지금의 을지로2가와 이곳에 걸쳐 있었던 옛 마을 이름에서 유래하였는데, 남산에서 발원한 창동천(倉洞川) 아래쪽에 있어 ‘물아랫골’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고친 이름이 수하동이었다. 그리고 수하동과 삼각동에 걸쳐서 있는 마을을 ‘보습곶이[犁洞]’라 하였는데, ‘보습곶이’라는 말은 이곳 지형이 농기구의 보습[犁, 쟁기나 가래 등의 술 바닥에 덧대는 삽모양의 쇠조각]과 같아서 붙여진 것으로 웃보습곶이[上犁洞], 아래보습곶이[下犁洞]가 있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관아인 도화서(圖畵署)가 있었다. 도화서는 신라시대 전채서(典彩署)와 고려시대 화방(畵房)으로 비롯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설치되어 처음에는 도화원(圖畵院)이라 하다가 도화서로 개칭되었다. 도화서는 그림의 교수(敎授)·고시(考試)·제조·보관 등에 관한 일체의 일을 맡은 관아로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또한, 이곳 북쪽 청계천 주변에 조선 광해군(光海君)때 실학자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의 집인 대은암(大隱庵)이 있다. 이 고가(古家)는 이수광의 아들 이민구(李敏求)에서 다시 외손 신필화(申弼華)에게로 이어졌는데, 역대 소유주가 모두 조선시대 대문장가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곳은 조선시대 말엽 개화사상의 선구적 인물인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오경석은 중인 출신의 역관으로 중국어와 서화 및 박제가의 실학을 공부하였다. 13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면서 재동(齋洞)의 박규수 집 사랑방에서 1870년 초부터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양반자제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여 1874년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이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현재 수하동의 행정은 명동 주민센터에서 관할하고 있다.
역사정보 조선 초기 한성부 대평방에 속함 일제강점기 수하정이라 불림 1946 수하동 동명제정
시대분류 현대/1946(동명제정)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수하동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수하동
시작일(발생일) 1946년(동명제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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