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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086 / 남학당 터
* 명칭 남학당 터 이명칭
개요 남학당(南學堂)은 지금의 중구 필동에 해당하는 한성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있었던 조선시대 4부학당(四部學堂)의 하나로, 1411년(태종 11)에 예조참의 허조(許稠, 1369~1439)의 건의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이다. 남학당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광해군(光海君) 때 중건하여 1894년(고종 31)까지 존속하였다. 남학당 터는 남학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188 일대에 해당한다.
설명 남학당(南學堂)은 조선시대 한성에 설치된 사학(四學)의 하나로, 한성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위치하고 있던 중등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 한성에는 고려시대의 학당제도를 계승하여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등 각부마다 학당을 하나씩 두었는데, 남학당은 지금의 중구 필동1가에 설립된 남부의 학당이었다. 남학당 터는 그 남학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188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초기 한동안 5개 학당을 두고 가르치다가 1445년(세종 27) 북부학당이 폐지되자 5부학당(五部學堂)이란 말 대신 4부학당(四部學堂)이라 하였다. 동학당(東學堂)은 종로구 종로6가에, 중학당(中學堂)은 종로구 중학동에, 서학당(西學堂)은 중구 태평로1가에 있었다. 4부학당은 독립적인 학교가 아니라 성균관(成均館)에 예속된 부속학교의 성격을 가진 학교로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예비학교였다. 따라서 4부학당은 성균관에 비해 규모가 작고 교육 정도가 낮았으나 방법이나 내용은 유사하였다. 4부학당 초기에는 건물이 없어 사찰을 빌려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1411년(태종 11) 예조참의 허조(許稠, 1369~1439)의 건의에 따라 남학당이 가장 먼저 자체 건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남학당에 이어 다른 학당들도 독립적인 학당 건물을 세우면서 모두 자체 건물을 갖게 되었다. 4부학당은 성균관에서 교관을 파견하고 학당의 잡무를 맡아보는 서리는 물론 노비까지도 배속해 주었다. 학생들의 성적은 학당에서 5일마다 시험을 치르고, 예조에서는 매월 학습한 내용을 평가하여 1년의 성적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국가에서는 학생교육을 위해 밭과 노비, 각종 물품 등을 내리고 서해안 여러 섬들의 어장(漁場)을 주어 그 세(稅)로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기숙사를 마련하여 학생들을 수용하고 그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였다. 4부학당에는 양인(良人) 이상의 8세 학동이면 입학할 수 있었고, 각 학당의 정원은 100명이었다. 학생들이 주로 배우는 교재는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였다. 학당제도는 유학을 진흥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고안된 고려와 조선의 독자적 제도였다. 현재 중구 충무로역 4번 출구의 매일경제 건물 앞에 1989년에 설치한 남학당 터 표지석이 있다.
역사정보 1411 건축 1419 증축 1610 중건 1989 남학당 터 표지석 설치
시대분류 조선/1411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188(필동1가 36-2)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1가
시작일(발생일) 14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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