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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918 / 신당동
* 명칭 신당동 이명칭
개요 신당동(新堂洞)은 광희문(光熙門) 동쪽에서 도로교통공단 교차로까지의 퇴계로 남쪽 일대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신당(神堂)을 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모여 살아서 무당촌을 이루었는데, 이 신당이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으로 변해서 신당동의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이곳에는 신당동떡볶이타운이 있어서 매년 10월 ‘신당동 떡볶이 문화축제’가 열려 떡볶이뿐만 아니라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설명 광희문(光熙門) 동쪽에서 도로교통공단 교차로까지의 퇴계로 남쪽 일대에 위치한 신당동(新堂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조선시대 한성부 소속 성외지역의 외곽으로 10리에 이르는 지역을 일컬음)에 속한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신당정(新堂町)이라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성동구 신당동이 되었다. 이후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로 중구 신당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신당(神堂)을 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모여 살아서 무당촌을 이루었는데, 이 신당이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으로 변해서 신당동의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예전에 광희문은 도성 안의 상여가 밖으로 나가던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1920년까지만 해도 이곳 일대는 많은 묘지들이 겹겹이 있었고 일본인의 전용 화장터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신당(神堂)이 설치되고 무당들이 많이 살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동활인서(東活人暑)가 있었다. 활인서는 도성 안의 환자(특히 전염병 질환의 환자)를 주로 구호(救護)하였던 의료기관으로 한양에는 동·서활인서 두 곳이 있었다. 1392년(태조 1)에 대비원(大悲院)이라고 하다가 1414년(태종 14)에 활인원, 1466년(세조 12)에 활인서로 개칭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1662년(광해군 4)에 다시 설치되었으나 유명무실하였고 영조 때 잠시 그 역할이 확대되기도 하였으나 1882년(고종 9)에 결국 폐지되었다. 광희문 앞에는 고개가 있었는데 신당동 화장터와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고갯길이 꼬불꼬불하고 넘기 힘들다 하여 아리랑고개라고 했다. 또한 신당동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높고 큰 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했다. 지금은 많이 낮아졌지만 이전에는 고개가 높고 험해서 도둑이 많아 행인들이 두렵게 생각했던 곳이다. 이곳 신당동에는 떡볶이타운이 유명하다. 1950년대부터 형성되어 1970~1980년대에 떡볶이 골목으로 그 이름을 알리게 되면서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매년 10월 ‘신당동 떡볶이 문화축제’가 열려 떡볶이뿐만 아니라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역사정보 조선 초기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에 속함 일제강점기 신당정(新堂町) 1946 성동구 신당동 동명제정 1975 중구 신당동 구역변경
시대분류 현대/1975(구역변경)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시작일(발생일) 1975년(구역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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