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상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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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정보 | JGH_000909 / [행정동]광희동 | ||
* 명칭 | [행정동]광희동 | 이명칭 | |
개요 | 광희동(光熙洞)은 충무로4·5가, 광희동1·2가, 인현동2가, 예관동, 오장동, 쌍림동, 을지로6·7가 행정을 담당하는 관할지역 명칭이다. 2013년 기준 광희동의 면적은 0.74㎢이며, 인구는 2,937세대에 6,107명이 거주하고 있다. | ||
설명 | 광희동(光熙洞)은 충무로4·5가, 인현동(仁峴洞)2가, 예관동(藝館洞), 오장동(五壯洞), 광희동1·2가, 쌍림동(雙林洞), 을지로6가, 을지로7가 행정을 담당하는 관할지역 명칭이다. 광희동의 동명은 도성팔문(都城八門, 서울성곽 8문) 가운데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인현동의 동명은 조선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아들 인성군(仁城君)의 집이 동네에 있었는데 인성붓재, 한자명으로 인성부현·인성현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서 인현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예관동의 동명은 조선시대 이 마을에 책을 찍어내던 교서관(校書館, 일명 운관(芸館)이 있어 교서관동·운동이라 하였는데, 후에 운(芸)을 예(藝)의 약자로 잘못 읽은 것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또 오장동의 동명은 이곳에 다섯 장사가 살았다고 해서 ‘오장삿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명으로 오장(五壯)이라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광희동은 조선 초기 한성부(漢城府) 5부(部) 52방(坊) 중 남부(南部) 명철방(明哲坊) 지역에 속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식 정회(町會)를 설치하면서 광희정(光熙町) 1정목(丁目)정회와 광희정 2정목정회가 되었다. 1947년 6월 서울시령 제2호로 동회제도를 시행할 때 광희동의 행정은 광희동1가동회와 광희동2가동회가 설치되어 그 관할구역을 담당하였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에 의해 행정동제가 시행될 때 광희1가동사무소와 광희2가동사무소로 명칭이 변경되어 행정을 담당하였다. 1970년 5월 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로 광희1가동·광희2가동·쌍림동을 통합하여 광희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로 을지로5가동이 폐지되면서, 그 관할구역의 일부인 을지로6·7가가 광희동에 편입되었다. 1992년 1월 3일 서울특별시 중구조례 제170호로 오장동 일부 지역이 광희동에 편입되었다. 1998년 9월 14일 정부조직 개편으로 구 충무로4·5가동과 통폐합되어 충무로4·5가 일부, 인현동2가, 예관동, 오장동 일부가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3년 기준 광희동의 면적은 0.74㎢로 중구 전체면적의 7.4%를 차지하며, 등록사업체 수는 1만 372개이다. 인구는 2,937세대에 6,107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통반 조직은 16개 통(統) 101개 반(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희동주민센터는 중구 퇴계로 303-9(광희동1가 252)에 위치하고 있다. | ||
역사정보 | 1914 일제에 의하여 동명을 광희정으로 개칭 1946 광희동1가동회, 광희동2가동회 설치 1955 광희1가동사무소와 광희2가동사무소로 명칭이 변경 1970 광희1·2가동·쌍림동을 통합하여 광희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 1975 을지로5가동이 폐지되면서 그 관할구역의 일부인 을지로6·7가가 광희동에 편입 1992 오장동 일부 지역이 광희동에 편입 1998 충무로4·5가동과 통폐합되어 충무로4·5가 일부, 인현동2가, 예관동, 오장동 일부가 편입 | ||
시대분류 | 현대/1946(동명제정) | ||
주제분류 | 문화/생활양식/기타 | ||
지번주소 | |||
도로명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303-9(광희동1가 252) 일대 | ||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1가 | ||
시작일(발생일) | 1946년(동명제정) | ||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