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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905 / 남창동
* 명칭 남창동 이명칭
개요 남창동(南倉洞)은 남대문시장 일대와 그 남쪽의 백범광장에 이르는 지역이다. 남창동의 동명은 이곳이 조선시대 선혜청(宣惠廳)의 창고가 있던 남쪽이라고 해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남대문시장의 영향을 받아 대규모 상업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설명 남대문시장 일대와 그 남쪽의 백범광장에 이르는 곳인 남창동(南倉洞)은 조선시대 초기 한성부 서부 양생방(養生坊)에 속했던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남미창정(南米倉町)으로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에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면서 남창동이 되었다. 남창동의 동명은 이곳이 조선시대 선혜청(宣惠廳)의 창고가 있던 남쪽이라고 해서 유래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남미창정도 남쪽 쌀 창고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혜청은 1608년(광해군 1)에 상평창(常平倉)을 개칭하여 대동법의 실시에 따라 대동미(大同米)·포(布)·전(錢)의 출납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1753년(영조 29)에 균역청을 병합하였다가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이곳 남창동은 조선시대에는 상진(尙震)·허목(許穆)·이항복(李桓福)·이유원(李裕元) 등과 같은 많은 명인(名人)들이 살았던 곳이다. 또한 1901년에 독일공사관과 상동교회(尙洞敎會)가 지어지는 등 서구문물의 영향이 일찍 미친 곳이기도 하다. 남창동에는 동대문시장과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거래가 많은 종합시장인 남대문시장이 있다. 이 시장은 조선 후기에 남대문 밖에 있었던 칠패시장이 그 바탕이 되었다. 동대문시장이 주단포목을 중심으로 거래된데 비해 남대문시장은 서울역과 가까워서 지방에서 철도로 올라온 물자가 집중되어 각종 품목 거래가 활발하였다. 남대문시장은 6·25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군복과 담요를 비롯한 각종 물품을 팔면서 상권을 장악해 ‘아바이 시장’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었다. 이 시장은 현대식 건물이 지어지기 전 겨울철이면 난방관계로 대화재가 일어나 많은 손해를 입었다. 숭례문 수입상가는 미군부대나 외국인으로부터 유출된 외래품이 거래되어 단속반이 오면 즉시 외제품을 치우고 국산품을 취급했으므로 ‘도깨비시장’이라고도 칭했다. 현재 남창동의 남대문시장은 한국 최대의 종합시장으로 해외관광객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관광코스 중의 하나이다.
역사정보 조선 초기 한성부 서부 양생방에 속함 일제강점기 남미창정으로 불림 1946 남창동 동명제정
시대분류 현대/1946(동명제정)
주제분류 문화/생활양식/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시작일(발생일) 1946년(동명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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