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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081 / 유묵록선기제석 마애각자
* 명칭 유묵록선기제석 마애각자 이명칭
개요 유묵록선기제석(遊墨麓先基題石) 마애각자(磨崖刻字)는 영조(英祖)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남산의 옛터를 방문하고 시를 지어 바위에 새긴 글씨이다. 이 마애각자는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6길 필동약수터 서쪽의 건물 뒤편에 있다.
설명 마애각자(磨崖刻字)는 바위에 새긴 글씨를 뜻하는 말로, 유묵록선기제석(遊墨麓先基題石) 마애각자는 영조(英祖)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남산의 옛터를 방문하고 시를 지어 바위에 새긴 글씨를 가리킨다. 이 마애각자는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6길 필동약수터 서쪽의 건물 뒤편에 있다. 조현명이 지은 시는 총 40자로 ‘선인이 덕을 펴시던 이곳에 장차 두어 칸의 집을 지으리라’라고 다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글자는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말미에 조현명의 호인 녹옹(鹿翁)이 새겨져 있다. 각자가 새겨진 방벽의 크기는 110×123×3㎝이다. 시문은 조현명의 《귀록집(歸鹿集)》에 전하고 있다. 조현명은 l7l3년(숙종 3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l7l9년(숙종 45)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용강(龍岡) 현령, 지평 등을 지냈다. l728년(영조 4) 이인좌(李隣佐)의 난 때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풍원군(豐原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사헌과 도승지를 거쳐 1731년(영조 7)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1732년(영조 8) 대마도 화재로 조정에서 위문미(慰問米)를 보내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733년(영조 9)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고 1734년(영조 10)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 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영조 16) 경신처분(庚申處分) 직후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1750년(영조 26)에는 영의정에 올라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전임, 호조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주장으로 호전법(戶錢法)의 실시가 논의되자 균역청당상(均役廳堂上)으로서 그 구체적 절목(節目)을 결정하여 양역(良役,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양반계급을 제외한 16~60세의 양민 남성에게 부과하던 부역을 말함)의 합리적 개혁을 보게 하였다. 조현명은 당색을 초월하여 두루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 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시조 1수가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조현명은 언제든지 벼슬을 버리고 전원생활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지금의 중구 필동로 6길 40에 정자를 세웠다. 이 정자는 그의 또 다른 호를 따라 귀록정(歸鹿亭)이라 하였다. 이 정자 주변 바위벽에 조현명의 시를 새긴 것이 유묵록선기제석 마애각자이다.
역사정보
시대분류 조선/미상
주제분류 문화/인물/기념비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6길 40(필동2가 134-27)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2가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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