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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93 / 명동길
* 명칭 명동길 이명칭
개요 명동길은 명동입구에서 명동성당 앞 거리에 이르는 보행자 위주 도로이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역사적 사연들이 가득한 유서 깊은 길이면서 대한민국의 유행과 예술의 전위로서 관광특구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설명 명동길은 폭 15m, 길이 500m의 보행자 위주 도로로서,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입구에서 명동길 80번지(카톨릭회관)에 이르는 길이다. 차량은 진입할 수 없으며 을지로 쪽에서 구간 중앙 교차로로 들어온 차량이 명동길 양쪽으로 빠져나가는 일방통행만 허용된다. 명동길의 이름은 이 일대를 지칭하는 조선시대의 동네 이름에서 유래했다. 조선 초기의 행정구역 명칭은 명례방(明禮坊)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명(明)자를 살려 메이지마치[明治町]로 불렀다가 광복 후 1947년 6월 명동(明洞)으로 개칭하였다. 명동 입구 일대는 조선말 일본상인과 청(淸)상인이 몰려와서 격렬하게 충돌한 시장경제의 격전지이다. 청상인은 상업술에서 우세하여 초기에는 수표교에서 소공동·서울중앙우체국 자리까지 차지하였다. 지금 중국대사관의 위치가 그때의 위상을 증언한다. 일본상인들은 진고개 일대 혼마치[本町]에서부터 남대문을 향해 가로로 뻗어갔다. 두 세력의 상업이 충돌하며 기싸움을 벌이던 접전지역이 바로 신세계백화점·중앙우체국 지역이다. 청일전쟁의 승패에 따라 청상인은 물러가고, 남대문과 명동 일대는 일본상인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메이지마치는 미쓰코시[三越]백화점을 필두로 쇼핑·레스토랑·카페·다방·당구장 등이 들어서면서 경성(서울) 최고의 다운타운 번화가를 이루었다. 이 성황을 바탕으로 조선은행·식산은행 등 금융기관이 들어서며 금융 경제의 중심가로도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명동이 관광특구로서 유행·음식·문화의 선구 역할을 하는 점도, 한국은행을 위시하여 금융업의 척추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명동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광복 후 일본이 떠난 뒤의 명동은 잠시 쇠락의 기운을 보였으나 6·25전쟁이 끝나면서 명동은 서울의 샹젤리제라는 별명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한다. 전쟁의 상처를 안은 채 당대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명동으로 모여들어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 당대의 첨단 유행과 유흥이 명동에서 먼저 선을 보였고, 가요와 연극·공연들도 명동을 중심으로 활발하였다. 박태원·조지훈·이상·박인환 같은 문인들과 구본웅·김환기·박수근 같은 화가들, 신상옥·유현목 등 영화감독, 김도향·송창식·양희은·조영남 등의 대중가수들이 명동길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명동길에 지울 수 없는 역사는 어두운 시대를 밝혔던 민주화의 성지라 불리는 명동성당에 새겨져 있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인사들의 각종 집회와 농성, 피신 및 단식 장소로 외국에도 널리 알려진 명소이다. 명동성당 터의 옛 이름은 한자로 종현(鐘峴)으로 종이 걸린 고개라는 뜻이다. 그래서 종마루, 북고개 또는 북달재라고도 부른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도심에서 가장 지대가 높아 종이나 북을 매달기에 적합했다. 이름의 유래에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종로 보신각의 종이 파괴되어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이 고개에 진을 치고 남대문의 종을 옮겨 달아 시각을 알렸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 하나는 이곳에 간고(諫鼓)라는 일종의 신문고(申聞鼓)를 매달아두고 억울한 자나 급히 알릴 일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북을 쳐 알리게 하였다는 설이다. 이 터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 김범우(金範禹)가 살던 곳이다. 명동성당은 프랑스 선교사 유진 코스트(E. G. Coste) 신부가 1892년 착공하여 1898년 5월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교회당이다. 국내 유일의 순수 고딕식 라틴 십자형 건물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역사정보 1966 ‘명동로’ 명명 1984 ‘명동길’ 개칭
시대분류 현대/1984(제정)
주제분류 장소 및 시설/교통/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1984년(제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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