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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92 / 다동길
* 명칭 다동길 이명칭
개요 다동(茶洞)길은 남대문로 서울 다동 우편취급국 앞으로 진입하여 태평로파출소 앞을 거쳐 무교로에 이르는 짧은 생활도로이다. 1㎞도 안 되는 이 짧은 도로가 관광특구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낙지·골뱅이·등갈비·한정식 음식점의 대표지역으로, 일명 ‘다동·무교동 음식문화거리’로 불린다.
설명 다동길은 남대문로 서울 다동 우편취급국 앞으로 진입하여 태평로파출소 앞을 거쳐 무교로에 이르는 짧은 생활도로이다. 앞의 절반은 왕복 2차선이고, 나머지 절반은 무교로 쪽으로 일방통행인 구간이다. 1㎞도 안 되는 이 짧은 도로가 관광특구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명동·남대문·북창 관광특구’가 확대 지정될 때 편입된 것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낙지·골뱅이·등갈비·한정식 음식점의 대표지역으로, 일명 ‘다동·무교동 음식문화거리’로 불린다. 다동의 먹거리 유래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옹원(司饔院)이란 관청이 있었다. 궁중의 음식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1392년(태조 1)에 설치했다가 1895년(고종 32)에 폐지된다. 사옹원 소속 부서 중에 ‘다방(茶房)’이 있었다. 이조(吏曹) 관할로 임금의 다례(茶禮)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차를 좋아했던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고려의 제도를 빌려 경복궁 내에 ‘다방(茶房)’을 설치하였고, 이 다방의 관원들이 총애를 받으면서 전국에 다례 열풍이 불었다. 지방 관청에서도 차를 다리고 시중드는 여자를 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다모(茶母)였다. 조선 초기 사옹원의 ‘다방’도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다동(茶洞)’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차 유행이 시들해지면서 다모들이 할 일을 잃었고, 그리하여 차츰 술을 나르는 관기가 되었다가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일반 기생으로 변해갔다. 같은 연유로 다동에도 일찍부터 기생집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생은 오늘날의 작부와는 성격이 다른 예기(藝妓)였다. ‘신분은 천민이나 머리는 양반’이라는 표현도 있고, ‘양반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解語花)’라는 별칭도 있었다. 1911년 다동에서 최초의 기생조합이 결성된다. 그러나 1914년부터 이 기생조합들은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권번들은 경쟁이 심해지자 전국의 이름난 독선생들을 모셔다가 독자적으로 예능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사실상의 전문 예능인 양성기관이었던 것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명창·명무들이 대부분 이 무렵 권번에서 훈련받은 예능인들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광복 후 다동길은 자연스럽게 문인·언론인·정치인들이 모이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오랜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이 문화중심지의 풍토도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다동길에는 ‘깊은 맛’의 세계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역사정보
시대분류 현대/미상
주제분류 장소 및 시설/교통/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길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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