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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86 / 서애로
* 명칭 서애로 이명칭
개요 서애로(西厓路)는 375m 길이의 왕복 2차선 도로로서 중구 퇴계로4가 교차로에서 필동3가를 잇는 길이다.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유성룡(柳成龍)의 호(號)에서 이름을 빌어 그 집터 부근의 도로를 1998년 서애로로 정하였다.
설명 서애로(西厓路)는 375m 길이의 왕복 2차선 도로로서 중구 퇴계로4가 교차로에서 필동3가를 잇는 길이다. 1998년 4월 17일 문화재지정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옛 행정구역명으로 남부(南部) 낙선방(樂善坊) 묵정동(墨井洞)에 있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옛 집터 부근 도로를 서애로로 지정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었던 서애 유성룡은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중에 군무를 총괄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인(西人)이 득세한 시기에 동인(東人)으로 영의정에 올라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긴급히 군대를 편성하였으며, 이순신과 권율 등을 발탁하여 한산대첩·행주대첩으로 대세를 반전시켰다. 특히 유성룡이 설치한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조선 후기의 5군영(五軍營)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군대로 성장하였고, 전국의 특산공물을 쌀로 대신 바치도록 한 조처는 후대 대동법(大同法)의 기초가 된 선견지명으로 꼽힌다. 그의 공을 질시한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고향인 안동 하회(下回)마을로 돌아갔을 때 서애 유성룡은 갑작스런 낙향으로 마땅한 거처조차 없었다고 한다. 유성룡은 하회에 은거하는 동안 누명을 벗고 다시 작위를 받았는데, 이후 7년여에 걸친 왕의 부름을 고사하며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저술에 전념한다. ‘징비(懲毖)’란 징계하여 삼가게 한다는 뜻으로 《징비록》은 훗날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유성룡은 황희(黃喜)·채제공(蔡濟恭) 등과 함께 조선 5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찬사를 받는다. 1607년 병환으로 사망하자 선조는 3일 동안 조회를 멈추고 승지를 보내 조문케 하였으며 상인들은 4일 동안 장사를 닫았다 한다. 또 서울 묵정동 옛집에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았던 마을 ‘묵정동’은 매우 깊은 우물이 있어 안이 어두컴컴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여 유래한 이름이다. 또한 마을 뒤에 먹을 만들어 팔던 묵사(墨寺)라는 절이 있어, 묵사동(墨寺洞)·묵동(墨洞)·먹절골·묵절골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역사정보 1998 유성룡의 옛 집터 부근 도로 ‘서애로’ 지정
시대분류 현대/1998(제정)
주제분류 장소 및 시설/교통/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서애로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1998년(제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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