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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79 / 필동로
* 명칭 필동로 이명칭
개요 필동로(筆洞路)는 퇴계로 대한극장 앞 진양상가교차로에서 남산 중턱까지 뻗은 막다른 오르막길이다. 1960년 필동천을 복개하여 길을 만들고 필동로라 명명하였다. 예부터 골이 깊어 남산골로 불린 필동은 인근에 한국의 집, 남산골 한옥마을, 주자소(鑄字所) 터, 서애 류성룡 생가 터, 귀록정(歸鹿亭) 터, 노인정(老人亭) 터 등의 명소가 있다.
설명 필동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대한극장 앞 진양상가교차로에서 남쪽을 향해 남산 중턱까지 거의 직진으로 뻗은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교차로에서 중간까지는 왕복 2차선, 이후는 단선도로다. 도로 남단은 남산북측순환로(혹은 남산북측순환산책로)와 이어진다. 원래는 이 길 자리에 필동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1960년 천을 복개하여 지금의 길을 만들고 필동로라 명명하였다. 필동의 동명(洞名) 유래는 조선 초 한성부(漢城府)가 행정구역으로 5부(部) 52방(坊)을 두었는데, 남부의 부(部)사무소가 이 동네에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얻은 이름이 부동(部洞)이었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부를 때 사이시옷(ㅅ)을 덧붙이하면서 붓골이 되었고, 이를 다시 한자로 표기한 것이 필동이다. 필동은 예로부터 공부하는 선비의 이미지가 강한 지역이었다. 필동 일대 남산골에는 실권한 남인(南人)·소론(小論) 그리고 과거(科擧) 재수생들이 많이 모여 살아 ‘남산골 샌님‘이란 별칭도 생겼다. 서울의 시전(市廛) 가운데서도 서책을 전문으로 파는 상인은 필동의 ‘상전(床廛)’이었다. ‘딸깍발이’라는 꼬장꼬장한 서울 선비의 별명도 이곳 남산골 샌님을 두고 생겨난 것이었다. 필동천 주변과 진고개 일대는 비만 오면 흙이 질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가난한 선비들은 평소에도 나막신을 오늘날 슬리퍼처럼 신고 다녔는데, 맑은 날에는 딸깍딸깍 소리가 났다 전해진다. 흔히 청계천을 경계로 남산골 샌님들이 모여 사는 지역을 남촌(南村)이라 하였고, 반대편 벼슬하는 양반들이 자리잡은 인왕산 일대를 북촌(北村)이라 불렀다. 북병남주(北甁南酒)라 하여, 북촌은 (경사가 많아서) 떡을 즐겨 먹고, 남촌은 (속이 답답해서) 술을 자주 마신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조선 말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북촌의 경화세족(京華世族) 사이에 도성 안의 경치 좋은 곳에 정자 꾸미기를 좋아했는데, 풍양 조씨(豐壤 趙氏)는 필동촌 상류를 좋아하였다. 조선 후기 헌종 때 세도정치를 했던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은 1840년경 지금의 필동로6길 30번지에 노인정을 세웠다. 당시 환갑이 넘은 조만영이 또래의 세력가들을 불러 노닐면서 지은 이름인데, 이것이 오늘날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노인정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1894년 7월 이 노인정에서 3차례에 걸쳐 역사적인 외교회담이 벌어지는데, 이른바 ‘노인정회담’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자진 해산하자 청군(靑軍) 견제 명분으로 7천 군대를 파병한 일본은 명분을 잃었지만 철병(撤兵)하지 않고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회담을 개최한다. 조선이 내정간섭임을 지적하며 개혁 요구를 거절하자 일본은 7월 23일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병영을 습격하여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로 인해 이틀 뒤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세월은 흘러 노인정은 사라지고, 정자 옆 바위벽에 새겨진 조씨노기(趙氏老基, 조씨의 노인정 터)라는 마애각자(磨崖刻字)만 남아 옛 사연을 전한다.
역사정보 1960 필동천 복개하고 도로명 제정
시대분류 현대/1960(제정)
주제분류 장소 및 시설/교통/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1960년(제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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