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역사문화자원Database Contents

역사문화자원

  • home >
  • 역사문화자원
  • 수정

 

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52 / 춘강박승희기념비
* 명칭 춘강박승희기념비 이명칭
개요 춘강박승희기념비(春崗朴勝喜記念碑)는 민중계몽을 위해 조직된 극단인 토월회(土月會)를 만들어 근대 연극의 기반을 다진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 박승희(朴勝喜, 1901~1964)의 애국정신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기리기 위해 1997년 문화체육부가 국립국장 안에 설립한 동상과 기념비이다.
설명 춘강박승희기념비(春崗朴勝喜記念碑)는 1997년 12월 문화체육부가 민중계몽을 위해 조직된 극단인 토월회(土月會)를 만들어 근대연극 발전의 기반을 다진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 박승희(朴勝喜, 1901~1964)의 애국정신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기리기 위해 국립국장 안에 설립한 동상과 기념비이다. 문화체육부는 문화예술을 빛낸 유명예술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1991년부터 기념조형물을 설치했는데, 춘강박승희기념비는 그 중 11번째로 세워졌다. 조각가 정관모가 설계하고 제작한 이 비는 높이 3.5m에 청동과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흉상과 기념비로 구성되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박승희는 1901년(광무 5) 서울에서 초대주미대사를 지낸 판서 박정양(朴定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중앙(中央)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메이지대학교[明治大學校] 영문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김복진(金復鎭)·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민중계몽을 위해 극단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하고, 자신의 막대한 유산까지 연극운동에 지원했다. 그의 첫 희곡은 1923년 7월에 올린 토월회의 제1회 공연 《길식(吉植)》으로 구도덕에의 항거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제2회 공연을 마친 뒤 창립동인이 대부분 탈퇴하고 박승희만이 남아, 학생극단이었던 토월회를 직업극단으로 개편하고 체호프 작(作) 《곰》, 버나드 쇼 작 《그는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 거짓말을 했는가》, 유젠 피로트 작 《기갈(飢渴)》 등의 번역극과 자작 희곡 《길식(吉植)》등의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심각한 재정난으로 1926년 제56회 공연을 마지막으로 토월회를 잠정 해산했다. 이후 몇 차례의 재기공연을 하며 민족수난의 현실을 절실하게 다룬 작품을 상연해 인기를 모았으나, 일본경찰의 탄압을 받고 해산하게 됐다. 1931년에 방송극협회를 조직하고 극단 대장안(大長安)도 창단했으나 공연하지 못했다. 1932년 토월회를 태양극장(太陽劇場)으로 개칭하고 주로 지방공연을 했으나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에 또다시 해산했다. 박승희는 1945년 광복이 되자 1946년에 토월회의 옛 단원들을 모아 토월회를 재건했다.《1940년》《의사 윤봉길》《모반의 혈》등의 레퍼토리로 토월회 재기공연을 가졌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63년 드라마센터가 주관하는 제1회 한국연극상을 받았고, 이듬해 사망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희곡 《사랑과 죽음》《산 서낭당》《이대감 망할 대감》《혈육(血肉)》《요부》《고향》《아리랑 고개》 등이 있다. 박승희는 민중계몽을 위한 연극을 주창했고, 각본과 연출, 극단경영 등 다방면으로 연극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 연극계에 신파극을 토착화시킨 첫 번째 공로자로 평가된다.
역사정보 1901 박승희 출생 1919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1923 일본 메이지대학 영문과 입학, 토월회 조직 1929 재정난과 일본경찰의 탄압으로 토월회 해산 1931 방송극협회 조직, 극단 대장안 창단 1932 토월회를 태양극장으로 개칭 1940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으로 태양극장 해산 1963 제1회 한국연극상 수상 1964 박승희 사망 1997 춘강박승희기념비 건립
시대분류 현대/1997
주제분류 문화/인물/기념비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 59(장충동2가 산14-67)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시작일(발생일) 1997년
인물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