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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47 /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 명칭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이명칭
개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가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의 뜻 깊은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세운 높이 3m의 기념비이다. 1973년 10월 서울시 중구 장충단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설명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가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의 뜻 깊은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1973년 10월 장충단공원에 세운 높이 3m의 비석이다. 파리장서운동은 제1차 유림단의거(儒林團義擧)라고도 부른다. 제1차 유림단의거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 유림대표 곽종석(郭鍾錫)과 충청도 유림대표 김복한(金福漢)의 두 갈래를 하나로 합한 김창숙(金昌淑)이 중책을 맡았다. 김창숙은 일본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전국의 유림 137인이 서명한 이른바 파리장서 혹은 유림단탄원서를 가지고 중국 상해(上海)로 갔다. 그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모인 인사들과 접촉하여 이 문제를 협의했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인 김규식(金奎植)이 프랑스 파리로 파견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창숙은 유림단탄원서를 각각 한문본 2,000부와 영문본 3,000부로 인쇄하여 김규식에게 보내고 국내외 각지에도 발송했다. 김규식이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평화회의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국제 여론이 환기되었다. 그러나 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일이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했다. 그 후 곽종석·김복한·하용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직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되었다. 이후 1920년과 1921년에 각각 2차, 3차 독립청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는 안동지역 유림인 이중업(李中業)이 중심역할을 했다. 1920년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했던 경상북도 지역 유림들을 중심으로 중국 광둥정부의 쑨원[孫文]과 중국 정부, 그리고 중국군벌 우페이푸[吳佩孚]에게 각각 1통씩 독립청원서 발송을 계획했다. 191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중국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중업의 갑작스런 병사(病死)로 이 일은 중단되었다. 이후 1921년 김해지역 유림 조경기(趙敬璣)의 발의로 3차 독립청원운동이 일어나 쑨원에게 직접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파리장서운동은 일제강점기 한국 유림들의 가장 조직적이고 행동화된 독립운동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역사정보 1919 3·1운동, 1차 독립청원운동(파리장서사건, 제1차 유림단의거) 1920 2차 독립청원운동(제1차 유림단의거) 1921 3차 독립청원운동(제1차 유림단의거) 1973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건립
시대분류 현대/1973
주제분류 문화/축조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57-10(장충동2가 197)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시작일(발생일) 1973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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