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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46 / 만해한용운시비
* 명칭 만해한용운시비 이명칭
개요 만해한용운시비(卍海韓龍雲詩碑)는 1987년 동국대학교에서 개교 80주년을 기념해 시인이자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제1회 졸업생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항일구국운동과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그의 대표작인 〈님의 침묵〉이 새겨진 이 비석은 동국대학교 본관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설명 만해한용운시비(卍海韓龍雲詩碑)는 동국대학교에서 개교 80주년을 기념해 시인이자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항일구국운동과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고자 1987년 10월 세운 비석이다. 동국대학교 본관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석은 높이 5m, 둘레 8m 크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한용운의 대표작인〈님의 침묵〉이 새겨져있다. 글씨는 예술원 회원인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비석은 대학과 동문들이 낸 기금으로 제작하였다. 이 비석의 건립은 1986년 5월 개교 80주년을 맞는 동국대학교에서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제1회 졸업생인 만해 한용운시비를 건립하는 기념사업을 계획해 1987년 10월 동국대 룸비니동산에서 시비의 제막식을 가졌다. 1879년(고종 16)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한용운의 본명은 정옥(貞玉)이고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6년(고종 33)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1905년(광무 9) 다시 설악산 백담사(百潭寺)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정식으로 득도(得度)했다. 한문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한 그는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다. 1908년(융희 2) 약 6개월간의 일본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했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 그는 만주지방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며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했다. 1918년에 월간잡지 《유심(惟心)》을 간행했다. 불교의 홍보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주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한용운은 1919년 불교계를 대표하여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다가,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감옥에서 3년을 보냈다. 그는 출옥 후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1925년 선서(禪書)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했다. 1926년에는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대표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수록된 88편의 시는 독립에 관한 강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했다. 1927년 반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1930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1935년 장편소설 〈흑풍(黑風)〉과 1936년 〈후회(後悔)〉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이어 1938년 직접 지도하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나 여러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한용운은 1944년 자택에서 사망하였고, 사후인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역사정보 1879 한용운 출생 1896 승려가 됨 1910 《조선불교유신론》 저술 1918 월간잡지 《유심》 간행 1919 불교계 대표로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1926 시집 《님의 침묵》출간 1927 신간회 결성, 중앙집행위원·경성지회 회장 역임 1930 잡지 《불교》 인수, 사장 취임 1938 만당사건에 연루 1944 한용운 사망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987 만해한용운시비 건립
시대분류 현대/1987
주제분류 문화/인물/문학비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1길 30(필동3가 26) 동국대학교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3가
시작일(발생일) 1987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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