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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34 / 다산정약용선생상
* 명칭 다산정약용선생상 이명칭
개요 다산정약용선생상(茶山丁若鏞先生像)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가 1970년 남산도서관 앞에 건립한 동상이다. 조선 후기 중농주의 실학자로 기술발달과 상공업 진흥 및 농업생산성 제고를 위한 여전제(閭田制)와 정전제(井田制),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의 도입과 조세부담의 공평성을 주장하며 부국강병책을 제시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경제사상을 본받고자 세워졌다.
설명 다산정약용선생상(茶山丁若鏞先生像)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가 1970년 남산도서관 앞에 건립한 동상이다. 동상의 규모는 대석 높이 4m, 동상 높이 4.5m, 총 8.5m의 높이로 부지면적은 150㎡이다. 서라벌예술대학 윤영자(尹英子) 교수가 조각했고, 동상의 글과 글씨는 각각 류홍렬(柳洪烈)과 김충현(金忠顯)이 담당했으며, 동상 전면의 글씨는 동상제작비용을 헌납한 진흥기업주식회사 사장 박영준(朴英俊)이 썼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 중농주의 실학자로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등이 있으며, 1789년(정조 13)에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에 급제한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총애 속에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연루되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 발전시켰는데, 《여유당전서》를 통해 각종 개혁사상을 제시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사회를 개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의 실학사상 내용은 다산정약용선생상의 뒷면에도 보인다. 그의 경제사상(經濟思想)에 대해 “기술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을 제시하고 농업생산성 제고를 위한 정책인 여전제(閭田制), 정전제(井田制)를 제안,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을 도입하고 조세부담의 공평성을 기하는 등 능률적인 경제운영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라고 적혀있다. 다산정약용선생상은 국가단위 공공예술프로젝트인 애국선열들의 조상(彫像) 건립 운동의 일환으로 건립됐다. 애국선열조상건립운동은 1964년 서울시내 미대생연합이 제작한 석고로 만든 37인의 역사인물 조상의 수리문제가 문화재위원회의 안건으로 올라가면서 시작된 것이다. 문화재위원회는 새로 위인동상건립위원회를 만들자는 결론을 냈다. 이어 1966년 제1회 5·16민족상 산업부문 장려상 수상자인 이한상(李漢相, 1917~1984)이 영구성 있는 동(銅) 또는 대리석으로 선열(先烈)들의 조상(彫像)을 건립하도록 의뢰하면서 상금 50만원을 서울신문사에 기탁했다. 당시 김종필(金宗泌) 공화당 의장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총재를 맡았고, 서울신문사가 주관사가 되어 1968년부터 1972년까지 5년간, 15기의 동상건립프로젝트가 실행되었다. 다산정약용선생상은 그 중 11번째로 세워졌다.
역사정보 1762 정약용 출생 1789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 1801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유배 1836 정약용 사망 1970 다산정약용선생상 건립
시대분류 현대/1970
주제분류 문화/축조물/동상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소월로 109(후암동 30-84)
지역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시작일(발생일) 1970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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