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역사문화자원Database Contents

역사문화자원

  • home >
  • 역사문화자원
  • 수정

 

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733 / 박명룡시은적덕비
* 명칭 박명룡시은적덕비 이명칭
개요 박명룡시은적덕비(朴明龍施恩積德碑)는 마을에 기근(饑饉)이 들자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가산을 털어 구제하였던 박명룡(朴明龍, 생몰년미상)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의 선행(善行)을 기리기 위해 1807년(순조 7) 마을 사람들이 세운 비석이다. 현재 남산공원 한남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설명 박명룡시은적덕비(朴明龍施恩積德碑)는 마을에 기근(饑饉)이 들자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가산을 털어 구제하였던 박명룡(朴明龍, 생몰년미상)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의 선행(善行)을 기리기 위해 1807년(순조 7) 마을 사람들이 세운 비석이다. 남산공원 한남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석의 규모는 높이 125cm, 너비 51cm, 두께 17cm이다. 현재 탁본이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은 1980년대에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명룡은 경상남도 진주(晋州) 서부(西部) 도저동(桃楮洞)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정확한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비문에 잘 나타나있다. 그는 관대하고 어진 성품의 소유자로,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남의 재난을 구제하고 은혜를 베푸는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겼다. 1793년(정조 17)에 심한 기근이 들었으나 조정에서는 마을주민 전체를 구제하기 힘들었다. 이때 박명룡은 그의 가산을 털어 어려운 이들에게 고르게 혜택을 주며 구호에 힘썼고, 가을이 되어 국가에서 빌린 쌀을 갚을 힘이 없는 수백 명의 기민(饑民)들을 위해 쌀을 대신 갚아 주었다. 1803년(순조 3)에는 1달 넘게 내리는 장마로 인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자가 속출하자, 가산을 털어 땔나무와 식량을 마련해 수백 명을 구제했다. 1805년(순조 5)에는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順王后)의 상(喪)을 치르기 위해 차출되었던 사람들에게 물건을 마련해 제공해주었다. 자신의 생활도 넉넉하지 못해 거친 음식도 먹지 못할 정도였는데도 박명룡은 이 같은 선행을 베풀었다. 조정에 박명룡의 포상을 건의했던 마을 사람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의 선행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글로 적어 비석을 세웠다. 이서하(李瑞夏)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고, 최양래(崔陽來)·양세흥(梁世興)·남중언(南重彦)·고상렴(高尙濂)·구규손(具奎孫)·성이규(成李奎) 등이 비석 건립에 힘썼다.
역사정보 1793 심한 기근이 들자 마을주민의 구호에 힘씀 1803 장마와 추위를 겪는 기민을 구제함 1805 정순왕후의 상례물품을 대신 마련해 제공 1807 박명룡시은적덕비 건립
시대분류 조선/1807
주제분류 문화/인물/기념비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산10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시작일(발생일) 1807년
인물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