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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067 / 남소영 터
* 명칭 남소영 터 이명칭
개요 남소영(南小營)은 한성부(漢城府) 남부 명철방(明哲坊)의 남소문 옆에 있던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으로, 1인의 초관(哨官)과 12인의 향군(鄕軍)이 지키던 군영(軍營)이다. 남소영은 청사가 모두 194칸에 이를 만큼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군영이었다. 남소영(南小營) 터는 그 남소영이 있던 곳이다. 1900년 고종은 남소영 터에 현충 공간인 장충단(獎忠壇)을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철거되었다.
설명 남소영(南小營)은 조선시대 남부 명철방(明哲坊) 남소문 옆에 있었는데, 현재 중구 동호로 257-10의 장충단공원 사전(祠殿) 터 아래가 된다. 남소영은 조선시대 중앙에 설치된 오군영(五軍營) 가운데 하나였던 어영청(御營廳)의 분영이었다. 그러나 남소영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는 후금에 대해 강경책을 표방하고 친정(親征)의 계획 아래 개성으로 나아갈 것에 대비하였다. 그 일환으로 개성유수 이귀(李貴)를 어융사(御戎使)로 임명해 260여 명의 화포군(火砲軍)을 뽑아 훈련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어영군(御營軍)의 시초였다. 그러나 인조의 친정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어영군을 해산시키지 않고 1624년(인조 2) 정월 개성유수에서 물러난 이귀를 어영사(御營使)로 임명하여 국왕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어영군은 잠시 총융사(摠戎使)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나,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인조 6) 12월에는 인원이 5,000명으로 늘어나 처음으로 청(廳)으로서 관부(官府)를 갖추고,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정점으로 하는 군영(軍營) 체제를 갖추었다. 순조(純祖) 이후 어영청은 장어영(將禦營), 총어영(總禦營) 등으로 바뀌었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과 함께 폐지되었다. 남소영 영사(營舍)의 규모는 194칸에 이를 만큼 큰 규모였고, 18문의 창고 부근에는 군영과 관련된 건물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의하면 남소영 북쪽에 137칸의 남창(南倉), 남소영 내에 52칸의 화약고가 있었으며, 초관(哨官) 1명과 향군(鄕軍) 12명이 근무하였다. 1900년 고종(高宗)은 남소영 터에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순직한 대신과 군인을 기리기 위한 장충단을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철거되었다.
역사정보
시대분류 조선/미상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57-10(장충동2가 197)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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