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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061 / 남소문 터
* 명칭 남소문 터 이명칭
개요 남소문(南小門)은 한양의 4개 소문(小門) 중 하나로, 1457년(세조 3) 지금의 중구 장충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1469년(예종 1)에 폐쇄된 후 숙종 때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개통되지 않았다. 남소문이 언제 없어졌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설명 남소문(南小門)은 한양의 4개 소문(小門) 중 하나이다. 이 문은 광희문(光熙門) 남쪽의 남산봉수대 동쪽에 있었던 성문으로, 지금의 중구 장충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흥인지문(興仁之門)과 숭례문(崇禮門) 사이에 있는 광희문을 남소문이라 오인하기도 하였으나 별도로 남소문이 존재하였다. 광희문과 별도로 남소문을 설치한 것은 교통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도성에서 한강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는 거리가 멀고 불편하였으므로 도성에서 곧바로 한강나루로 나갈 수 있도록 새로 설치한 문이 남소문이었다. 남소문을 축조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 따르면, 1456년(세조 2) 11월 20일에 세조가 종친과 재상들을 거느리고 청학동(靑鶴洞, 현 장충동 일대)에 나가서 문의 건립지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1457년(세조 3) 9월 세자가 죽은 것에 대해, ‘남소문을 낸 뒤에 의경세자가 죽었다.’라는 말이 나돌았던 것으로 보아 1457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남소문은 설치된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에 임원준(任元濬) 등의 건의에 의하여 폐지되는데, 그 이유는 실제 통행에 있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음양가(陰陽家)들이 동남쪽으로 문을 낸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을 세운 뒤 세자가 사망하여 음양가의 주장이 맞았다는 풍문이 세간에 돌기도 하였다. 나중에 숙종(肅宗) 때에 남인들이 남소문을 다시 개통하자는 의견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서인들이 음양학에 입각해 문을 개통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논리를 들어 반대하였다. 결국, 서인 측의 주장이 관철되어서 남소문은 재개통되지 못하였다. 남소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역사정보 1457 남소문 축조 1469 남소문 폐쇄
시대분류 조선/1457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산5-21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시작일(발생일) 1457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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