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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519 / 이문 터
* 명칭 이문 터 이명칭
개요 이문(里門)은 조선 전기에 화재와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 서울의 각 마을 입구에 설치했던 일종의 방범초소라 할 수 있다. 세조 때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운영되었던 이문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방치되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현재 동대문구 이문동(里門洞)이라는 동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나, 당시에는 이문동이라 불리는 마을이 여러 곳 있었다.
설명 이문(里門)이란 성문이나 일반가옥의 대문과 비교해볼 수 있는 것으로, 대로에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골목길 또는 큰길로 이어지는 작은 길 어귀에 마을문으로 설치된 것이다. 이문의 기원은 고대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던 것이나, 조선시대의 이문은 국가적 방범시책으로서 1465년(세조 11) 11월 8일 임금이 한성부에 이문을 설치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인 1466년에는 도성의 이문 내에 10호 이하는 매일 밤 2인, 20호 이하는 3인, 30호 이하는 4인, 30호 이상은 5인을 동원하여 교대로 순찰하도록 하고 순관과 병조에서 수시로 감독하며, 이문과 가까운 곳에 인접해 있는 경수소(警守所)는 곧 폐지하고, 외방에서는 수령이 민가가 조밀한 곳을 택하여 이문을 설치했다. 이와 같이 이문은 마을 규모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순찰조를 운영하는 제도였으며, 마을의 도적을 방지하는 관청 조직의 일선업무를 주민 스스로 행하는 자율방범 제도였다. 즉, 관청에서 주도하는 치안제도가 아니라 순전히 주민들에 의해 설치되고 관리되었던 주민자치 치안제도였다. 한편 이문이 설치된 지 불과 6년이 지나 숙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등 기강이 해이해지는 사례가 나타났다. 이에 성종의 노력으로 다시 운영되기도 하였으나, 연산군을 거쳐 중종·명종에 이르러서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때는 이문을 창설한 후 약 100년이 경과된 시점으로 이문이 노후하여 파괴되고 무너져서 형체조차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문은 임진왜란 후 대부분 소실됨으로써 본래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그나마 약간의 기록이 보이지만 순조 이후에는 기록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1930년대 인사동 이문 사진을 보면 다락이 달린 2층 기와 문루로 판자문을 통해 골목에 사는 동민이 출입하게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역사정보 1465 세조가 한성부에 이문 설치 1600년대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이후 유명무실해짐
시대분류 조선/1465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55(태평로2가 150)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2가
시작일(발생일) 1465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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