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역사문화자원Database Contents

역사문화자원

  • home >
  • 역사문화자원
  • 수정

 

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505 / 3·1독립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
* 명칭 3·1독립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 이명칭
개요 3·1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얼마 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갑성(李甲成, 1886~1981)이 기독교 계통의 주요 지도자들과 더불어 사전 연석회의를 개최한 장소이다. 이갑성은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된 사람이다. 3·1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 표석은 1993년에 서울역 지하철1호선 4번 출구 앞, 현재 세브란스빌딩 맞은편에 세워졌다.
설명 3·1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세브란스병원 제약 지배인으로 근무하던 이갑성(李甲成, 1886~1981)이 기독교 계통의 주요 지도자들과 더불어 당시 세브란스병원이었던 이 자리에서 사전 연석회의를 개최한 곳이다. 이갑성은 1919년 2월 11일 남대문 밖 교회를 방문한 이승훈으로부터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 사이에 독립운동을 위한 거사가 논의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 날인 2월 12일 밤 세브란스병원 음악회가 끝난 뒤 지난 1월 27일 대관원(大觀園) 모임에 참석한 바 있는 한위건·김원벽·김형기·윤자영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김문진·이용설·배동석을 병원 구내 자신의 사택으로 불러 국내외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 뒤 이갑성은 한 차례 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독립운동 추진상황을 알렸다. 한편 2월 21일 밤에는 장로회 측의 이승훈·함태영·이갑성·안세환·김세환·김필수·오상근, 감리회 측에서 박희도·오화영·신흥식·오기선·현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장로회·감리회 양 교단의 지도자 연석회의가 이갑성의 집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양 교단 지도자들은 천도교 측과의 합동문제에 대해서는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하나로 힘을 합칠 수 있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는 3·1운동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현상윤의 노력이 컸다. 현상윤은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이 이루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고, 동경 유학생 대표로 송계백이 국내로 왔을 때 그를 만나 2·8독립선언이 실행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동경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을 천도교 측에 알림으로써 천도교 측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도교 측과의 교섭은 최남선·최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3·1운동은 천도교·기독교·불교의 3대 종교계 지도자들이 연합함으로써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종교계 연합의 아이디어는 현상윤·송진우·최남선 등에 의해 제안되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기독교 측의 이승훈과 연락하여 천도교 측과의 연합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3·1운동의 실천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송진우·최남선·최린 등의 의견이 맞지 않아 연합이 결렬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현상윤이 이를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갑성은 1919년 3·1운동 당시 34세의 나이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3·1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 표석은 1993년에 서울역 지하철1호선 4번 출구 앞, 현재 세브란스빌딩 맞은편에 세워졌다.
역사정보 1993 세브란스병원 터 앞 표석 설치
시대분류 일제강점기/1919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독립유적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0(남대문로5가 84-11)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시작일(발생일) 1919년
인물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