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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501 / 양성지 살던 곳
* 명칭 양성지 살던 곳 이명칭
개요 양성지 살던 곳[梁誠之址]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살았던 곳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42에 해당한다. 양성지는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한 이래 일생 동안 서적의 편찬과 간행에 힘을 쏟은 인물로,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설명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역사와 지리에 해박하여 평생을 서적편찬과 간행에 노력한 인물이다. 세종(世宗)부터 성종(成宗)까지 모두 6명의 왕을 섬겼으며,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양성지의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양성지는 6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9세에 능숙하게 글을 지었다고 한다. 사마시에 급제한 후 다시 1441년(세종 23)에 과거에 급제하여, 훈구파의 중진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참여하였으며, 1453년(단종 1)에는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이듬해에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편찬하였다. 또 1455년(세조 1)에는《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으며, 1463년(세조 9)에는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하였다. 양성지는 서적의 보존과 간행에도 노력해 10조(條)의 상소를 하였으며,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71년(성종 2)에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좌리공신에 녹훈되고, 1481년(성종 12)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양성지는 나라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의창(義倉)을 설립하거나, 백정(白丁)에게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자고도 하였다. 또, 혼례를 간단히 하고 연찬(宴饌) 역시 간략하고 검소하게 열 것을 주장하는 등 풍속에 대한 개혁적인 입장을 펼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를 현실에 맞게 개정할 것을 여러 차례 제안하고, 아악(雅樂)의 보호와 체계적 정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세조가 제갈량이라고 부를 정도로 총애한 인물이었으며, 조선 후기 개혁군주인 정조(正祖)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하였다. 양성지가 살았던 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42에 해당한다. 그곳에는 ‘양성지 살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역사정보 1415 출생 1441 사마시 급제 후 다시 과거급제 1481 동국여지승람 편찬 참여 1482 사망
시대분류 조선/1415
주제분류 문화/인물/생가(터)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42(초동 18-15)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시작일(발생일) 1415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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