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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459 /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터
* 명칭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터 이명칭
개요 국립박물관(國立博物館) 남산분관(南山分館) 터는 1950년부터 1954년까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이 위치했던 곳이다. 원래 이 자리는 1884년 이후 일제에 의해 일본공사관, 통감관저, 총독관저, 조선총독부 시정기념관(施政紀念館) 등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광복 후인 1946년 국립민족박물관으로 개편되었다가 1950년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으로 개편 통합하였다. 1954년 이후에는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활용되다가 철거되어 현재 이 자리에는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통감관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설명 조선시대 이곳에는 철종 때 문신 박영원(朴永元)이 지은 녹천정(綠泉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러다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자 정자를 허물고 이곳에다 일본공사관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통감관저, 총독관저로 사용되었다. 일본공사로서 이곳에 입주한 사람 중 특기할 만한 인물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이다. 그는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기 10년 전인 1900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7년 동안 머물면서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로로 일제는 남작의 작위를 내리고,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까지 이곳에 세워주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부터 이곳은 통감관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당시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이 통감관저 2층에서 ‘병합조약’을 불법적으로 조인했다. 이 조약 체결 이후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면서, 이곳 역시 통감관저에서 총독관저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총독관저로 사용되던 이곳은 1939년 9월 제9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경복궁 후원 경무대에 총독관저를 신축한 뒤, 1940년부터 여기에 있던 건물은 병합조약을 기념하고 역대 통감과 총독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국립박물관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1915년 12월 1일 경복궁 안에서 개관)을 인수하여 동년 12월 3일 개관하였다. 이 무렵인 1946년 국립박물관은 일제강점기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시정기념관을 국립민족박물관으로 개편하고, 1950년에는 국립민족박물관을 다시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으로 개편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54년 이후 이 건물은 다시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철거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신영복이 쓰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통감관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역사정보 1851 박영원이 녹천정 건립 1884 갑신정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자 이곳에 공사관 건립 1906 통감관저로 사용 1910 총독관저로 사용 1940~1945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시정기념관으로 사용 1946 시정기념관을 국립민족박물관으로 개편 1950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으로 개편 통합 1954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철거 2010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통감관저 터’라는 표지석을 세움
시대분류 현대/1950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6가길 6(예장동 2-1)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시작일(발생일) 1950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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