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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458 / 총독관저 터(통감관저 터)
* 명칭 총독관저 터(통감관저 터) 이명칭
개요 이곳은 1906년부터 1910년까지는 통감관저(統監官邸)가, 1910년부터 1939년까지는 총독관저(總督官邸)가 자리했던 곳이다. 현재 이 자리에는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이 서 있다.
설명 조선시대 이곳에는 철종 때 문신 박영원(朴永元)이 지은 녹천정(綠泉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러다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자 정자를 허물고 이곳에다 일본공사관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통감관저, 총독관저로 사용되었다. 일본공사로서 이곳에 입주한 사람 중 특기할 만한 인물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이다. 그는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기 10년 전인 1900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7년 동안 머물면서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로로 일제는 남작의 작위를 내리고,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까지 이곳에 세워주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부터 이곳은 통감관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당시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이 통감관저 2층에서 ‘병합조약’을 불법적으로 조인했다. 이 조약 체결 이후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면서, 이곳 역시 통감관저에서 총독관저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총독관저로 사용되던 이곳은 1939년 9월 제9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경복궁 후원 경무대에 총독관저를 신축한 뒤, 여기에 있던 건물은 병합조약을 기념하고 역대 통감과 총독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경술국치 이후 29년간 일본 식민통치의 본산이었으니 우리로서는 치욕의 현장이다. 광복 후 이곳은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신영복이 쓰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통감관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역사정보 1851 박영원이 녹천정 건립 1884 갑신정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자 이곳에 공사관을 건립 1906 통감관저로 사용 1910 총독관저로 사용 1940~1945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시정기념관으로 사용 1945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철거 2010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통감관저 터’라는 표지석을 세움
시대분류 대한제국/1906(통감관저), 일제강점기/1910(총독관저)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6가길 6(예장동 2-1)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시작일(발생일) 1906년(통감관저), 1910년(총독관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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