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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440 / 녹천정 터
* 명칭 녹천정 터 이명칭 일본공사관 터, 통감관저 터, 총독관저 터
개요 녹천정(綠泉亭) 터는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박영원(朴永元, 1791~1854)이 1851년(철종 2) 남산 기슭에 지은 정자인 녹천정이 있던 곳이다. 녹천정은 개항 이후 일본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후에도 이 자리에는 통감관저, 총독관저가 차례로 들어섰다. 현재 이곳에는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통감관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설명 박영원은 조선 후기 철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기(聖氣), 호는 오서(梧墅)로서, 예조참의 종순(鍾淳)의 아들이다. 1813년(순조 13) 사마시를 거쳐 18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주서(假注書)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고, 다음해에 승문원에 보임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1824년에는 이가우(李嘉愚)·이헌위(李憲瑋)·김정희(金正喜) 등과 함께 관직을 박탈당했다가, 1837년(헌종 3) 김홍근(金弘根)과 함께 회복되어 실록(實錄)을 맡아보는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어 1844년에는 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이듬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846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부사(副使) 조형복(趙亨復), 서장관(書狀官) 심희순(沈熙淳)과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11월에는 김흥근(金興根)과 함께 국조보감찬집청교정당상(國朝寶鑑纂輯廳校正堂上)을 제수받았다. 1848년 양선(洋船)의 출몰로 동해안 지방의 민심이 소란해지자 함경도관찰사로 특임되었다. 그 뒤 철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라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4월에 소를 올려 그 직을 사임하였다. 1854년(철종 5) 12월에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녹천정(綠泉亭)은 박영원이 1851년(철종 2) 남산 기슭에 지은 정자로,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관이 불타자 일본이 반강제로 빼앗아 허물고 새로 공사관을 지었으며, 1906년부터 통감관저로 쓰였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총독관저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신영복이 쓰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통감관저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역사정보 1851 박영원이 녹천정 건립 1884 갑신정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자 이곳에 공사관을 건립 1906 통감관저로 사용 1910 총독관저로 사용 1940~1945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시정기념관으로 사용 1945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철거 2010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민족연구소가 표지석을 세움
시대분류 조선/1851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6가길 6(예장동 2-1)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시작일(발생일) 1851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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