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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432 / 박팽년 집터
* 명칭 박팽년 집터 이명칭
개요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집터는 사육신으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의 문신 박팽년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가 들어섰으며, 건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영빈관(迎賓館)으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한국의 집으로 재개관하여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설명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 중의 한 명이다.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 조선시대에 왕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보던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1438년(세종 20)에 사가독서(賜暇讀書, 인재 양성을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였을 만큼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삼문(成三問)과 더불어 집현전(集賢殿)에 발탁되어 한글편찬에 참가하였다. 집현전 내에서도 경학·문장·글씨·시 등 모든 면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의 칭호를 받았다. 박팽년은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부탁받고 1453년(단종 1)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김질(金礩) 등과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김질이 밀고하여 처형당하였다. 1691년(숙종 17)에 관작을 회복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다. 박팽년이 살았던 집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일제강점기 그 장소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가 들어섰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건물은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1981년 당시 대목장이었던 신응수(申鷹秀)가 경복궁(景福宮) 자경전(慈慶展)을 본떠 건물을 새로 지은 뒤 1982년 한국의 집으로 재개관하였다. 한국의 집은 내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지어진 문화공간으로 정통 궁중요리를 맛볼 수 있으며, 가(歌)·무(舞)·악(樂)으로 이루어진 8가지의 다양한 전통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이외에도 김치 만들기, 탈만들기, 한지공예, 사물놀이 등 다양한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의집은 남산의 정기를 받은 남산 4대 명당 터 중 한 곳으로 유명해 전통혼례를 위한 명소로 알려져 있다.
역사정보 1957 공보실에서 개관, 한국의 집 명명 1980 경북궁 자경전을 본떠 개축 1981 한국의 집 재개관
시대분류 조선/미상
주제분류 문화/인물/생가(터)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36길 10(필동2가 80-2)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2가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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