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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429 /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
* 명칭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 이명칭
개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집터는 조선시대 학자 이항복이 살았던 집터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 집터만 남아 있고, 큰 바위 왼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필운대는 예부터 봄 경치가 매우 수려하여 봄이 되면 많은 문인들이 시를 지으며 꽃구경을 하던 장소로 유명하였다.
설명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상(子常)이며,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 등이다. 필운대(弼雲臺)는 이항복의 호 필운(弼雲)에서 따온 명칭이다.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 가운데 오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 친구로 지내면서 이항복이 남긴 많은 일화들은 그의 짓궂은 성격과 뛰어난 기지를 잘 보여준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 조선시대에 왕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보던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항복은 l583년(선조 l6)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젊은 문신들에게 주어지던 휴가인 사가독서(賜假讀書)에 뽑힐 만큼 재능을 인정받던 인재였다. l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항복은 왕비를 개성으로 호위하였으며, 이어 두 왕자를 평양으로 호위하고, 선조를 의주로 호종(雇從)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5차례나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대내적으로는 국가적 재난을 타개하고,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의 사신의 응대를 담당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항복은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지리서의 하나인 《한경지략(漢京誌略)》에 의하면 이항복의 집은 원래 도원수 권율(權慄)의 집으로 이항복이 권율의 딸과 결혼하면서 집을 물려받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집은 흔적이 없으며, 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 뒤편에 집터임을 짐작케 하는 암벽만이 남아 있다. 높이 5~6m 정도의 몇 개의 암벽이 옆으로 맞붙어 있고, 그 위에 필운대(弼雲臺)라고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이항복의 후손인 귤산(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 시구의 글씨를 통해 암벽의 필운대라는 글씨가 이유원의 글씨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필운대 주변은 수많은 살구꽃과 복사꽃이 장관을 이루어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봄이면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필운대로 몰려들었다고 하며, 정조(正祖)·박지원(朴趾源)·정약용(丁若鏞) 등이 필운대에서 꽃구경을 하며 시를 남겼다고 알려진다. 필운대의 모습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장동팔경(壯洞八景)의 그림으로도 남아 있어 당시의 수려한 경관을 확인해볼 수 있다. 백사 이항복 집터와 필운대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0년 7월 15일에 서울특별시가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하였다.
역사정보 1889 이유원이 시구를 새김 2000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9호로 지정
시대분류 조선/미상
주제분류 문화/인물/생가(터)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1-2
지역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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