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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396 / 남궁억 집터
* 명칭 남궁억 집터 이명칭
개요 남궁억(南宮檍, 1863~1939) 집터는 남궁억이 살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6 일대에 해당한다. 남궁억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언론인으로,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이며, 서울 출생이다.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과 《황성신문(皇城新聞)》 창간을 주도하고,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했다. 이후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 활동으로 체포되어 석방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설명 남궁억(南宮檍, 1863~1939) 집터는 남궁억이 살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6 일대이다. 남궁억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언론인으로,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고,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했다. 1884년(고종 21) 그는 외국어 통역관 양성을 위한 학교인 통변학교(通辯學校)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이후 내부(內部) 주사(主事)와 칠곡군수를 역임했다. 이어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甲午更張) 직후 내부 토목국장에 임명되어 서울 종로·정동·육조·남대문 일대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 공원을 조성하는 등 현재 서울 도심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 1896년(고종 33)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남궁억은 관직을 사임한 뒤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고, 1898년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해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행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등 구국(救國)활동에 주력했다. 이어, 1907년 남궁억은 양양군수로 재직하면서 동헌(東軒)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세우고, 교육 잡지인 《교육월보(敎育月報)》를 발행했다. 1910년에는 배화학당(培花學堂)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며, 1912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9년에는 요양을 위해 강원도 홍천으로 거주지를 옮긴 뒤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했다. 이후 일제가 민족정신의 말살을 목적으로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자, 남궁억은 이에 저항하여 모곡학교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고,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국에 걸쳐 전개했다. 이때 그가 지은 노래인 〈무궁화 동산〉이 민간에 널리 유행했다. 그러던 중 1933년 기독교계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투옥됐다. 1939년 석방되었으나, 4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62년 남궁억에게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고,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한편, 남궁억의 집터가 있던 곳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정보 1863 남궁억 출생 1896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 1898 황성신문 창간에 참여 1939 남궁억 사망 1977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시대분류 대한제국/1863
주제분류 문화/인물/생가(터)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6(정동 34-31)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시작일(발생일) 1863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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