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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391 / 어서각 터
* 명칭 어서각 터 이명칭 최규서어서각 터
개요 어서각(御書閣) 터는 왕의 어필(御筆)을 보관하던 어서각이 있던 곳이다. 일명 최규서어서각(崔奎瑞御書閣)은 영조가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崔奎瑞, 1650~1735)에게 내린 어서(御書)‘일사부정(一絲扶鼎)’ 편액을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9에 해당한다.
설명 어서각(御書閣)은 왕의 친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전각(殿閣) 또는 어필각(御筆閣)이라고도 한다. 어서각 터는 그 어서각이 있던 곳이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 소재하고 있던 어서각은 최규서(崔奎瑞, 1650~1736)의 집터 안에 있던 것으로 영조(英祖)의 어필을 봉안하던 곳이다. 조선 숙종(肅宗)때 우의정을 지낸 최규서는 영조 즉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의 평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1728년(영조 4) 경기도 용인에 있던 그는 무신난(戊申亂)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서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조정으로 달려와 그 사실을 알리고, 토난책(討難策)을 건의하였다. 무신난을 평정한 뒤 영조는 최규서의 공을 치하했는데, 최규서는 관련 내용이 문서에 기록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이에 영조는 한 가닥의 실올로 솥을 붙든다는 뜻의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어필을 내렸다. 이는 한 가닥의 절의(節義)로 나라를 붙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최규서는 이때 받은 영조의 어필을 자신의 집 근처에 전각을 지어 보관하였다. 그것이 바로 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자리에 있었던 어서각이다. 어서각은 1900년대에 접어들 무렵, 다른 건물이 들어서게 되자 현재의 위치인 최규서의 묘가 있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로 이전되었다. 원래 어서각이 있던 서울 중구 정동길에는 어서각 터 표지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어서각은 정면 4.94m, 측면 3.7m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내부에는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 쓰인 어필 편액(가로 140cm, 세로 55cm)과 최규서의 위패, 영정, 비망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안성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정보 1728 무신란이 발생하자 이를 고발 1728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어필 하사 1800년대 말~1900년대 초 어서각을 경기도 안성으로 이전
시대분류 조선/1700년대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9(정동 17-1)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시작일(발생일) 1700년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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