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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030 / 동악선생시단 각자
* 명칭 동악선생시단 각자 이명칭 동악선생시단 바위글씨
개요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 각자(刻字)는 조선 중기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을 주축으로 형성된 시단(詩壇)을 기념하여 이안눌의 후손 이주진(李周鎭)이 1700년대에 만든 바위글씨이다. 글씨가 새겨진 바위는 원래 중구 필동로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바위글씨의 일부만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987년 바위의 원래 위치에 표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설명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은 조선 중기의 관료이자 시인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을 주축으로 당대의 문인들이 모여 시를 지으며 놀던 모임, 또는 그 장소를 말한다. 이안눌의 4대손인 이주진(李周鎭)이 동악선생시단의 의미를 기리기 위하여 모임이 열렸던 동원(東園) 마루턱 바위에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라는 글씨를 해서(楷書)로 새겼다. 바위가 있던 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동국대학교 경내였다. 동원이 위치한 남산 자락은 서울을 내려다보는 신선의 고장으로 낙선방(樂善坊) 청학동(靑鶴洞)이라 불렸다. 이곳에 위치한 이안눌의 집에 당대의 문장가들이 드나들며 시를 통해 교류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안눌과 더불어 시단(詩壇)을 이룬 인물은, 정철(鄭澈)의 제자였던 권필(權韠)을 비롯하여 이호민(李好閔), 홍서봉(洪瑞鳳), 이정구(李廷龜) 등 후대에 이름을 떨친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동원에서 시를 짓고 풍악을 즐겼는데, 그들이 모임을 갖던 동원의 다락을 시루(詩樓)라 하고 그 단을 시단(詩壇)이라 불렀다 한다. 동악선생시단에 관한 기록은 이안눌의 후손인 이석의 문집 《동강유고(桐江遺稿)》에 실린 ‘동원기(東園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원기는 남산자락에 위치한 동원의 형세와 연혁 등에 대해 기술한 글로, 이에 따르면 동원은 원래 이안눌의 진외가인 능성(綾城) 구씨(具氏)의 터전이었다가 이안눌의 증조부이자 중종(中宗) 때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 대에 와서 덕수(德水) 이씨(李氏)의 소유가 되었다. 이 동악선생시단 각자는 원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3가 동국대학교 구내 계산관 앞 계산고시학사 뒤에 있었다. 1984년 동국대학교에서 고시학관을 지을 때 그대로 떠다가 ‘시루’의 자리인 학생회관 옆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심한 풍화로 쪼개지는 바람에 그 조각을 모아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대신 바위글씨가 있던 곳에는 1987년 8월 표지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동악선생시단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교유(交遊)하던 모임으로 옛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던 방식을 보여준다.
역사정보 1700년대 동악선생시단 바위글씨 조성(새김) 1984 동악선생시단 각자 파손 1987 동악선생시단 각자 표석을 건립
시대분류 조선/1700년대
주제분류 문화/인물/기념비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1길 30(장충동2가 192-5)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시작일(발생일) 1700년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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