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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282 / 선혜청 터
* 명칭 선혜청 터 이명칭
개요 선혜청(宣惠廳) 터는 조선시대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따라 거둔 세수(稅收)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청인 선혜청이 있던 곳이다. 선혜청은 1608년(선조 40)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설립된 후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대동법을 혁파하면서 없어졌다. 선혜청 터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소월로 3 일대에 해당한다.
설명 선혜청(宣惠廳)은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따라 거둔 세수(稅收)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한 재정기관이다. 대동법은 세금으로 내던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이다. 세금을 공물로 납부하게 한 공납제(貢納制)의 폐단이 커지면서 나타난 조치였다. 선혜청을 줄여 혜청(惠廳)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선혜청 터는 선혜청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소월로 3 일대에 해당한다. 선혜청은 1608년(선조 40)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설립하였다. 이후 강원도·충청도·전라도·함경도·경상도·황해도 순서로 대동법을 적용하고, 또한 재정관청인 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균역청(均役廳)을 차례로 흡수하면서 선혜청은 조선 후기에 호조(戶曹)를 능가하는 최대의 재정기관이 되었다. 선혜청은 조선말까지 존속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대동법을 혁파하면서 없어졌다. 선혜청은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과 민씨(閔氏) 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1882년(고종 19)에 일어난 구식군대의 변란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선혜청의 관원으로는 정1품의 도제조(都提調) 3명, 종2품 이상의 제조(提調) 3명, 종6품의 낭청(郎廳) 4명을 두었는데, 낭청 4명이 각각 영남·경기의 대동청(大同廳), 호남·강원의 대동청, 호서·해서의 대동청, 그리고 진휼청(賑恤廳, 조선시대 물가조절과 굶주린 백성의 구제를 담당한 관청)·상평청(常平廳, 조선시대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를 위한 비축곡물 및 자금을 관리하던 관서)의 업무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또 낭청 아래에 회계전문가인 계사(計士)를 두어 1명이 2개의 청(廳)을 분담하고, 서리(書吏)와 고직(庫直)을 배치하였다. 선혜청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동미의 출납을 위해 용산강(龍山江, 현재 원효대교가 있는 한강 일대로 용산진이라고도 함)에 별창(別倉)을 두고, 삼청동에 북창(北倉), 옛 장용영(壯勇營) 자리에 동창(東倉), 남대문 안에 남창(南倉)을 두었다. 선혜청에서는 각 도의 대동법 규정에 따라 부과량을 징수한 뒤 각 감영(監營)과 군현의 경비 및 유치미(留置米), 중앙 상납분를 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도는 감영과 군현의 소요예산을 작성하고, 그 명세를 선혜청에 보고하였다. 현재의 남대문시장은 바로 선혜청의 창고를 바탕으로 생겨났다. 또한 선혜청의 창고가 있어서 창동(倉洞)이라는 동명이 생겼고, 그 북쪽의 북창동과 그 남쪽의 남창동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현재 중구 소월로 3 숭례문 수입상가 앞에 선혜청 터 표지석이 있다.
역사정보 1608 선혜청 설치 1652 선혜청 기구 및 인원 확대 1882 임오군란 발생 1894 갑오개혁으로 선혜청 폐지
시대분류 조선/1608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소월로 3(남창동 51-1)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시작일(발생일) 1608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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