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상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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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정보 | JGH_000215 / 청계천 효경교 터 | ||
* 명칭 | 청계천 효경교 터 | 이명칭 | 효경다리, 효교, 소경다리(새경다리), 맹교 |
개요 | 효경교(孝經橋)는 지금의 세운상가와 세운교 자리의 청계천변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다리이다. 다리 주변에 눈먼 장님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소경다리(새경다리), 맹교(盲橋) 등으로도 불렸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다리의 기능은 세운교(世運橋)가 대신하고 있다. | ||
설명 | 효경교(孝經橋)는 종묘 앞 청계천에 놓여져 있던 다리이다. 1530년에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풍교(永豊橋)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효경교라는 이름은 선조 때 권상(權常)·권동흥(權東興) 두 사람의 효자와 권규(權規)의 처 유씨(柳氏)가 이 근처에 살았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효경다리(孝經다리), 또는 줄여서 효교(孝橋)라고도 불렀다. 또한 인근에 눈먼 장님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소경다리(새경다리), 맹교(盲橋)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리 서쪽 기둥에는 ‘정사금영개조(丁巳禁營改造)’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영조 때 청계천 준천사업 이후 1797년에 국왕호위와 수도방어를 담당했던 금위영(禁衛營)에서 효경교를 보수한 것을 표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천주교를 박해한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전국적으로 천주교도 8,000명이 처형되었는데, 이때 처형이 시행되었던 동대문 인근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시구문)에서 이곳 효경교까지 청계천의 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다리는 일제강점기에도 존속하였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된 것으로 추측된다.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 때 다리의 기초 부분 석조 구조물이 발견되어, 길이 13줄, 너비 최소 3줄의 다리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석조 구조물은 현재 복원된 청계천에 원래 위치 그대로 놓여 있으며, 그 위로 새로운 형태의 세운교(世運橋)가 청계천복원사업에 따라 2005년에 준공되어 오늘에 이른다. | ||
역사정보 | 1530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풍교라는 이름으로 소개 1797 수도방어를 담당했던 금위영에서 효경교 보수 1958 청계천 복개공사 때 효경교 철거 2003 청계천 복원공사 때 다리의 기초 부분 석재 발견 2005 효경교 터 위로 세운교 완공 | ||
시대분류 | 조선/미상 | ||
주제분류 |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 ||
지번주소 | |||
도로명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산림동 200-6 | ||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산림동 | ||
시작일(발생일) | 미상 | ||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