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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182 / 청계천 광통교 터
* 명칭 청계천 광통교 터 이명칭
개요 청계천(淸溪川) 광통교(廣通橋) 터 조선시대 초기 준설된 광통교가 있던 곳이다. 광통교는 청계천을 잇는 다리 중 가장 큰 다리였으며, 경복궁·육조거리·종루·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중심통로의 역할을 수행했다.
설명 청계천(淸溪川)은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와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으로, 길이 10.84㎞, 유역면적은 59.83㎢이다.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이곳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청계천의 본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광통교(廣通橋)는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그 크기가 가장 컸으며 경복궁·육조거리·종루·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를 연결하여 당시 나라 안의 대로(大路)라고도 불렸다. 광통교는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大廣通橋)라고 하였으며, 줄여서 대광교(大廣橋) 혹은 광교(廣橋)라고도 불렀다. 또한 다리 주변에 시전(市廛)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이기도 했다. 광통교는 조선 초기 도성을 만들 때부터 놓인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토교(土橋)였지만, 1410년(태종 10)에 큰 홍수로 다리가 무너지자 이를 석교(石橋)로 다시 놓았다고 한다. 폭 15m, 길이 13m에 높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노출된 다리발을 볼 때 최소한 2.5m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광통교는 조선 최초의 돌다리였다. 덧붙여 광통교가 석교로 바뀌는 과정에서 태종(太宗)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를 도성 밖 양주로 이전시키고, 그 묘를 구성했던 석물(石物)을 가져와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1762년(영조 38)의 증축 이래, 광통교는 청계천 이남과 이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다가 1958년에 이루어진 청계천 복개공사 때 땅속에 묻혔다. 2004년에 이루어진 청계천 복원구간 시굴조사 때 관련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2005년 3월 25일 수표교(水標橋) 터, 오간수문(五間水門) 터 등과 함께 서울 청계천유적으로 통칭되면서 사적 제461호에 지정되었다.
역사정보 조선 초기 토교(土橋)로 지어짐 1410 홍수로 다리가 무너짐, 석교로 복구함 1762 증축 1958 청계천 도심부 복개 공사 때 매몰 2003~2004 청계천 복원공사 때 관련 유구 발굴 2005 사적 제461호 지정
시대분류 조선/미상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사지, 전지, 유지, 원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1가 9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1가
시작일(발생일) 미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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