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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0142 / 중화민국총영사관
* 명칭 중화민국총영사관 이명칭
개요 중화민국총영사관(中華民國總領事館)은 원래 1882년(고종 19)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 후 설치된 청국공사관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화민국과 왕징웨이[汪精衛] 괴뢰정부의 영사관이었으며, 광복 후에는 주한 타이베이대사관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992년 중국과 수교가 성립된 이후 현재는 주한 중국대사관이 이용하고 있다.
설명 중화민국총영사관(中華民國總領事館) 대지는 조선시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심복으로 포도대장을 지낸 이경하(李景夏)의 집터였다. 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따라 상무총판(商務總辦)으로 진수당(陳樹棠)이 파견되었다. 진수당은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귀양간 이경하의 집을 차지하고 청국공사관을 설치하였다. 진수당의 후임자인 위안스카이[袁世凱] 역시 1885년부터 1894년 청일전쟁 때까지 10년간을 이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발발과 함께 위안스카이가 본국으로 도피하면서, 청국과 외교관계가 잠시 단절되었다. 그 후 1899년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이 체결되자 이곳은 다시 청국영사관이 되었고, 1912년 중화민국 수립을 기점으로 중화민국총영사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중일간 외교관계가 단절되면서 일본이 중국에 세운 괴뢰정권인 왕징웨이[汪精衛] 정부의 영사관으로 쓰였다. 광복 후 1947년 이곳에 중화민국 임시영사관이 설치되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주한 타이베이대사관이 되었다. 한편, 1965년 당시 타이베이정부는 재정난 때문에 대사관 대지 중 3,300여㎡를 재일교포 사업가 정규성(丁奎成)에게 매각하였고, 정규성은 그 자리에 코스모스백화점을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이베이정부의 일방적인 매각조치에 일부 화교들이 대사관에 몰려와 량쉬자오[梁序昭] 당시 타이베이대사를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대지를 매각한 돈으로 타이베이정부는 1968년 지하 1층 지상 7층의 콘크리트건물과 지상 3층의 부속건물을 지어 한중수교 직전까지 약 44년간 새 대사관으로 사용하였다. 타이베이와의 단교 후 노태우정부는 중국과의 수교협상 과정에서 서울 명동의 대사관 부지를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타이베이대사관이 철수하고, 한 달 후인 1992년 10월 1일 중국 국경절을 기해 중국의 외교관들은 옛 타이베이대사관에 입주해 오성홍기를 게양했다. 반면 타이베이대사관은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로 격하되어 동화면세점 빌딩으로 이전하였다.
역사정보 1882 청국공사관 설치 1894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과 청국이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철수 1899 한청통상조약으로 청국공사관이 다시 설치 1912 중화민국의 수립을 계기로 중화민국총영사관으로 명칭 변경 1937 중일전쟁 이후 왕징웨이정부의 영사관으로 변경 1947 중화민국(대만) 임시영사관 설치 1965 부지의 일부를 코스모스백화점(현 Noon Square 위치)에 판매 1992 한국과 타이베이 간 국교 단절로 주한 중국대사관 설치
시대분류 조선/1882
주제분류 장소 및 시설/기타 부대시설/외국공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길 27(명동2가 83-7)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시작일(발생일) 1882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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