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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224 / 대한제국군 전투지
* 명칭 대한제국군 전투지 이명칭
개요 대한제국군 전투지(大韓帝國軍 戰鬪地)는 1907년 6월 일제가 고종(高宗)을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대한제국군이 무장봉기하여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던 장소로, 현재의 서울상공회의소 일대에 해당한다. 대한제국군은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병영을 점령당한 뒤 각지로 흩어졌으며,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초석을 놓았다.
설명 1906년(고종 44) 통감부(統監府) 설치 이후 조선의 병합을 서두르던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高宗, 1852~1919)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인 군대를 해산시켰다. 8월 1일 오전 8시경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이 무장해제 된 상태로 군대해산식이 거행되는 훈련원으로 출발하려 할 즈음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1907) 참령(參領)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은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병영 주위에 초병을 배치한 뒤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서소문 일대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자 숭례문 안에 있던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사들도 호응하여 무장을 하고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다. 대한제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군은 9시 30분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전 병력과 제1·2대대의 응원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숭례문 성벽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막강한 화력과 숫자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대한제국군은 결국 10시 50분경 남대문 병영을 점령당하고 이어서 11시 40분경 서소문 병영마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병영에서 퇴각한 한국군의 일부는 서소문 밖 고지 일대를 배경으로 저항을 계속했고, 각지로 흩어져 의병진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초를 놓았다. 《한국경성전도(1903)》에 서소문 안 남동쪽으로 대한제국군 시위 제1대대 병영(현 서소문동 120)이, 숭례문 안 동남쪽으로 친위 제2대대 병영(현 남창동 34)이 표기되어 있다. 이 두 병영을 중심으로 한 서소문과 숭례문 일대가 군대해산 당시 시가전이 벌어졌던 대한제국군 전투지이다. 현재의 서울상공회의소 일대로 당시의 모습과는 완전히 변형되어 있는 상태이다.
역사정보 1906 일제 통감부 설치 1907 고종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 체결 1907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박승환 참령의 권총자결에 격분하여 장병들 무장봉기, 해산한 대한제국군 의병 합류
시대분류 대한제국/1907
주제분류 문화/유적지, 사적지/독립유적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39(남대문로4가 45) 서울상공회의소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
시작일(발생일) 1907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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