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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222 / 함태영 사택 터
* 명칭 함태영 사택 터 이명칭
개요 함태영(咸台永, 1872~1964) 사택(舍宅) 터는 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종교인으로 활동한 함태영의 사택이 자리했던 곳이다. 사택은 3·1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 기독계의 거점이자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사용되어 독립운동의 일원화에 기여하였다. 해당 자리는 현재의 중구 세종대로 10-2로 추정되며, 사택은 도로로 편입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설명 함태영(咸台永, 1872~1964)은 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종교인으로 함경북도 무산(茂山) 출생이다. 1898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를 수석으로 수료하고, 이듬해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사건 때 이상재(李商在)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한 적이 있었으나, 그 후 대심원(大審院)·복심법원(覆審法院)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재임 중에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10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장로(長老)가 되었고 3·1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 1921년 목사 안수를 받고 복음운동에 투신하였다. 광복 후 심계원장(審計院長),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919년 당시 남대문밖교회의 조사(助事, 장로교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는 교직)였던 함태영의 사택은 3·1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 기독교계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그의 사택이 독립운동 근거지로 떠오른 것은, 1919년 2월 송진우를 만나 독립운동 거사 제의를 받은 이승훈이, 귀향길에 남대문밖교회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이승훈과 함태영은 장로교계와 감리교계의 규합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지지부진하던 천도교 측과의 교섭도 최린과 이승훈이 전격 회동하면서 해결되었다. 기독교 측의 교섭위원이었던 이승훈과 함태영은 2월 23일 천도교 측의 최린과 독립선언 문제를 협의한 뒤, 그날 밤 함태영의 집에서 제2차 장로회·감리회 지도자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천도교 측에서 주장하는 독립선언서 발표 방침을 수용하기로 함으로써 독립운동 일원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독립운동사료집》 5권에 따르면, 3·1만세운동 당시 함태영은 남대문통 5정목 75번지 남대문밖교회 조사 사택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성부 지형명세도(1929)》와 현 지번도를 통해 그 위치를 추적해보면, 도로 확장 과정에서 지하철 1호선 서울역 5번 출구 앞 도로로 편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정보 1872 함경북도 무산 출생 1898 최초의 법관양성소를 수석으로 수료하고 법관 생활을 함 1910 법관 사직, 기독교에 귀의 1919 3·1운동 준비과정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일원화에 기여, 민족대표 48인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시대분류 일제강점기/191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0-2(남대문로5가 84-1)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시작일(발생일) 1919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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