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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221 / 이갑성 사택 터
* 명칭 이갑성 사택 터 이명칭
개요 이갑성(李甲成, 1889~1981) 사택(舍宅) 터는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으로 재직하던 이갑성이 거주하던 병원 구내 사택이 있던 곳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주요모임을 진행한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사택 건물은 멸실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주유소 등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설명 이갑성(李甲成, 1889~1981)은 한말의 독립운동가이다.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였다. 이어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을 살포하는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의 지배인이 되고, 19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31년에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이 되었다. 1933년 신간회(新幹會) 사건으로 상하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한 후, 1940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1925년 결성된 기독교계의 항일민족주의운동 단체)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여러 정치적 활동을 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이갑성의 사택은 독립운동을 위한 주요 모임을 진행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갑성은 1919년 2월 11일 남대문밖교회를 방문한 이승훈을 통해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 사이에 독립운동을 위한 암중모색이 진행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이에 2월 12일 밤 세브란스병원 음악회가 끝난 뒤, 1월 27일 대관원 모임에 참석한 바 있는 한위건·김원벽·김형기·윤자영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김문진·이용설·배동석을 병원 구내 자신의 사택으로 불러 국내외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 뒤 이갑성은 한 차례 더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독립운동 추진상황을 알렸다. 한편 2월 21일 밤에는 제1차 장로회·감리회 양 교단 지도자 연석회의가 이갑성의 집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천도교 측과의 합동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에 따르면, 3·1만세운동 당시 이갑성은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으로 재직하면서 남대문통 5정목 15번지 병원 구내 사택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남대문통 5정목 15번지는 현재 남대문로5가 84번지로 지번이 통폐합되었는데, 1940년대 말 세브란스의과대학 및 부속병원 건물 배치도를 통해 지금의 GS역전주유소 주변이 그에 해당하는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정보 1889 대구 출생 1915 세브란스 의전 졸업 1919 세브란스병원 구내의 사택에서 독립운동 준비를 위한 주요모임 진행,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독립운동을 하여 체포
시대분류 일제강점기/191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15(남대문로5가 84-17)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시작일(발생일) 1919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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