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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214 / 신석구 사택 터
* 명칭 신석구 사택 터 이명칭
개요 신석구(申錫九, 1875∼1950) 사택(舍宅) 터는 일제강점기에 수표교교회의 담임목사를 맡았던 신석구 목사의 사택이 위치했던 곳이다. 신석구는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이후 북한에서 반동비밀결사(反動秘密結社)의 고문을 지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현재의 중구 수표동 65-3번지에 해당하며, 신석구 사택은 이미 멸실되었고 그 자리에 빌딩이 들어서 있다.
설명 신석구(申錫九, 1875∼1950) 사택(舍宅) 터는 신석구가 담임을 맡고 있던 수표교교회의 목사 사택이 위치했던 곳으로 지금의 중구 수표동 65-3번지에 해당한다. 1919년 8월 26일 고등법원의 〈신석구 신문조서〉 및 〈손병희 등 48인 판결문〉 등에 따르면, 당시 주소는 경성부 수표정(水標町) 65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가옥은 멸실되었으며 가옥이 있던 자리에는 빌딩이 들어서 있다. 신석구는 충청북도 청주(淸州)에서 출생했으며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졸업한 뒤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南浦) 등지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민족사상 고취에 힘을 다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오화영(吳華英, 1880~1960)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석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2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감리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해 면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1945년 5월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 거부로 용강경찰서에 연행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 남아 목회를 계속했는데, 1949년 4월 진남포 반공비밀결사조직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6·25전쟁 때 희생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역사정보 1875 충청북도 청주 출생 1907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가 됨 1919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1919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참여 1950 6·25전쟁 중 총살 1963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시대분류 일제강점기/191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65-3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시작일(발생일) 1919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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