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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187 / 청계빨래터
* 명칭 청계빨래터 이명칭
개요 청계빨래터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이용하던 빨래터를 재현한 것으로 2005년 청계천복원사업 당시 다산교(茶山橋)와 영도교(永渡橋) 사이에 빨래판 모양의 판석(板石) 여러 개를 설치하고, 뒤쪽에는 능수버들 16그루를 심었다. 유사 풍경이지만 청계천은 과거 아낙들의 빨래터이자 그들의 시름을 나누던 이야기 터인 까닭에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설명 청계빨래터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이용하던 빨래터를 재현한 것으로 서울시 중구 황학동의 다산교에서 영도교 일대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청계천(淸溪川)은 인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청계천 상류와 지천(支川)은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었고, 지금의 성동구 마장동 동쪽의 하류지역은 채소 등을 재배하는 농업용수로 사용되었다. 청계천 본류는 오염되어 세탁이나 허드렛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악산(北岳山),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계곡의 물은 맑았으므로 새벽이면 물장수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에는 면포(綿布)를 표백하는 사람들과 제지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살았다. 동대문의 채소 상인들은 오간수문(五間水門) 부근에서 채소를 씻어 내다 팔았다. 청계천 물줄기 양쪽에는 빨래터가 있었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 큰비가 와서 청계천 주변의 더러운 쓰레기들이 씻겨 내려가고 맑은 물이 흐르면 인근의 아낙네들은 빨랫감을 들고 몰려나와 빨래를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가난하여 주인의 행랑채에 살면서 일해주는 ‘드난살이’ 여인 빨래꾼들도 청계천을 작업장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성부 내에 20여 곳의 사설 빨래터가 있어서 빨래꾼들에게 하루 사용료를 10전(錢)씩 받았다. 1924년 경성부는 청계천 3곳에 공설빨래터를 설치할 예산을 세웠다. 경성부는 공설빨래터에 2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도록 수조(水槽, 물웅덩이), 침전지(沈澱池, 물속에 섞여 있는 흙·모래를 가라앉혀 물을 맑게 만들기 위한 못), 빨래 삶는 가마솥 2개 등을 갖추기로 하였다. 이용료는 사설빨래터가 10전씩 사용료를 받는 것에 비해 빨래를 삶는 연료비만 실비(實費)로 받는다고 발표하였다. 2005년 청계천복원사업 준공 시 다산교(茶山橋)와 영도교(永渡橋) 사이에 청계천 옛날 빨래터를 재현하였다. 빨래판 모양의 판석을 여러 개 늘어놓은 유사 풍경이지만 청계천은 과거 아낙들의 빨래터이자 그들의 시름을 나누던 이야기 터인 까닭에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2줄로 늘어선 버드나무 아래로 푸른빛 장옷을 쓰고 흰 빨래를 이고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를 재현하기 위해 청계천복원공사 때 충남 천안시에서 옮겨온 능수버들 16그루를 빨래터 뒤에 심었다.
역사정보 2005 청계천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청계빨래터 재현
시대분류 현대/2005
주제분류 장소 및 시설/전시, 관람시설/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황학동 163-9 다산교, 영도교 일대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황학동
시작일(발생일)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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