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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163 / 이유원
* 명칭 이유원 이명칭
개요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이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이계조(李啓朝)의 아들이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9세손이다. 충무로 생민동(生民洞)에서 태어난 그는 박학하고 시·문장·서법 등 다방면에 뛰어났으며 고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개화(開化)파로 쇄국(鎖國)을 주장하는 대원군과 대립했고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다방면의 저술을 통해 당대의 문화·예술을 체계화 했다.
설명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남산 기슭 202번지에 거주했는데 선조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추앙하여 백사의 종계서(宗稧序)를 따라 흩어져있던 파보를 모아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족보를 정리했다. 또 백사의 옛 집터를 사서 수리하고 선조의 고사(故事)를 추모하여 정자이름도 전과 같이 쌍회정(雙檜亭)으로 바꾸어 달았고 필운대(弼雲臺)에 조상을 기리는 시구를 써놓았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檢閱) 및 대교(待敎)를 거쳐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를 배경으로 고종 초에는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반목(反目)했다. 1865년(고종 2) 판부사(判府事)로서 경복궁 중건에 대해 재정궁핍을 문제로 난색을 표했는데 이로 인해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좌천되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대원군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75년(고종 12)에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추진하였다. 1882년(고종 19) 신식(新式)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 구식(舊式)군대가 차별문제로 충돌을 일으키자 흥선대원군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일본인 장교를 죽인 사건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빚어진 양국 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서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박학하고 시, 문장, 서법, 예서 등 다방면에 뛰어났으며 철저한 고증을 통해 당대의 문화·예술을 다방면의 저술을 통해서 체계화 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며, 저서로 《임하필기(林下筆記)》《가오고략(嘉梧藁略)》《귤산문고(橘山文稿)》 등이 있다.
역사정보 1808 출생 1873 영의정에 임용 1858 사망
시대분류 조선/1814~1888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814년~18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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