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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161 / 박영원
* 명칭 박영원 이명칭
개요 박영원(朴永元, 1791~1854)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기(聖氣)이며, 호는 오서(梧墅)이다. 예조참의(禮曹參議) 박종순(朴鐘淳)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약해진 왕권을 세우는데 교육이 중요하다 여기고 35년간 세자와 왕의 스승으로 일하며 학문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그는 남산 기슭 예장동 2번지 시냇물 흐르는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계절의 풍경을 즐겼다.
설명 박영원(朴永元, 1791~1854)은 1813년(순조 13) 사마시(司馬試)로 진사가 되고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로서 경연관이 되었다. 이후 청요직(淸要職)을 거쳤으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4도(四道)의 감사(監司)와 육조판서(六曹判書)를 모두 역임하고 좌의정(左議政)까지 올랐다. 효명세자·순조·헌종·철종의 세자시강(世子侍講)을 맡아 35년간 세자와 왕의 스승으로 있었다. 순조를 제외하면 왕에 오른 뒤에 시강을 맡아 가르침의 시간이 짧았다. 그러나 박영원은 학문을 통해 어린 임금을 군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특히 노력했다. 장기간의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약해져 있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의 문집인 《오서유고(梧墅遺稿)》의 강의록에는 세자시강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조세를 경감하고 형벌을 감면하여 민생을 보위하고 면학에 힘써 임금의 소임을 다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하에서 세도가의 한 노선을 지지하지 않았고, 유능한 실무능력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으며 정치적 논란에 얽히지 않았다. 또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꿈꾸며 세자와 왕의 스승으로서 노력하였다. 실록에서는 항상 조심하고 겸손하였으면 4명의 임금을 모시는 동안 집안에 쌓인 재물이 없었고 타고난 성품이 독실하고 몸가짐이 간중(簡重)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저서로는 《오서유고》가 있다.
역사정보 1791 출생 1854 사망
시대분류 조선/1791~1854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791년~18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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