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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160 / 정원용
* 명칭 정원용 이명칭
개요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이다.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정동만(鄭東晚)의 아들로서 남산 기슭인 회현동2가에 화수루(花樹樓)를 짓고 살았다. 5명의 임금을 모셨는데 그중 철종·고종 때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세도정치로 인하여 왕권이 약해져 관기가 문란해지고 삼정(三政)의 폐단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설명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은 1802년(순조 2)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조참의(吏曹參議)·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다. 1831년(순조31)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후로도 승진을 거듭하여 1842년(헌종 8)에는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헌종 사후에 영의정으로서 강화에 사는 덕완군(德完君)을 왕으로 영립할 것을 주장하여 철종을 옹립하였다.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쇠약해진 왕권 위에 순조 때부터 이어져온 세도정치의 폐해가 집적되어, 관기(官紀)가 문란해지고 각 곳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정원용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암행어사(暗行御史) 제도를 부활시키도록 건의했다. 1862년에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정계에 나섰다. 삼정이란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布)로 받는 군정(軍政), 구휼미 제도인 환정(還政)을 뜻하는 말로, 철종 재위 시절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이어지면서 백성들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제도이다. 이에 전국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자 정원용은 수습책을 강구해 삼정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1863년(철종 14)에 철종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정사를 돌봤으며 이듬해에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정원용은 91세로 장수를 누렸고 72년간 벼슬에 있었지만 검소하여 재산을 늘리지 않았으며 나랏일에 부지런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글씨에 뛰어나 《경산집(經山集)》《북정록(北征錄)》《수향편(袖香編)》《문헌찰요(文獻撮要)》《경산일록(經山日錄)》 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중 《경산일록》은 정원용이 과거 급제 후부터 운명하기 전까지 약 71년간에 걸쳐 기록한 일기(日記)이다. 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 때의 정치·사회상이 담겨있어 사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역사정보 1783 출생 1848 영의정에 임용 1873 사망
시대분류 조선/1783~1873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783년~18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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