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상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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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정보 | JGH_001159 / 조현명 | ||
* 명칭 | 조현명 | 이명칭 | |
개요 | 조현명(趙顯命, 1690~1753)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이다. 도사(都事) 조인수(趙仁壽)의 아들로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노론 출신이지만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지지했고, 당색을 초월해 소론의 인물들과도 교유했으며, 특히 소론계의 박문수(朴文秀)와 친밀했다. 영조의 정책수행에 적극 협조했고 청렴한 생활을 일관했으며 지극한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
설명 | 조현명(趙顯命, 1690~1753)은 1713년(숙종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9년(숙종 45)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훗날 영조로 등극하는 연잉군(延礽君)이 노론의 지지로 왕세제(王世弟, 왕위를 계승할 임금의 아우를 이르던 말)에 책봉되었다. 그러자 소론(小論)은 연잉군을 핍박했고, 조현명은 세제보호론을 주창하여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연잉군은 영조로 즉위한 후, 소론과 노론을 모두 기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시행하여 당쟁의 격화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1728년(영조 4)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李麟佐) 등이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앞세워 난을 일으켰다. 조현명은 이때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였다. 난의 진압으로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풍원군(豊原君)에 봉해졌다. 그해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고 1731년(영조 7)에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심각한 기근(飢饉)으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진휼(賑恤)에 힘썼다. 이듬해 대마도(對馬島)의 화재로 조정에서 위문미(慰問米)를 보내려 하자 “왜인(倭人)이란 해마다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고 또 사신을 보내지도 않는데 위문미부터 보내는 것은 잘못”이라며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733년(영조 9) 다시 기용되어 판의금(判義禁)까지 특진되었으나 형정(刑政)에 대한 불공정을 상소하고 김성탁(金聖鐸) 사건에 바른말을 하다가 다시 파직 당했다. 이후 다시 복직되었고 승진을 거듭하여 1750년(영조 26)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듬해에 호조판서(戶曹判書) 박문수(朴文秀)의 주장으로 호전법(戶錢法)의 실시가 논의되자 균역청당상(均役廳堂上)으로서 그 구체적 절목(節目)을 결정하여 양역(良役, 조선시대에 16세~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을 합리적으로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당파로는 노론(老論)에 속했으나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했고,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다양한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영조의 정책수행에 적극 협조했고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여 2차례나 파직 당하기도 했으나 영조의 신임을 잃지 않았다. 청렴한 생활을 일관했으며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지기도 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며 저서로는 《귀록집(歸鹿集)》이 있다. 조현명은 남산 기슭 필동2가에 귀록정(歸鹿亭)을 짓고, 벼슬살이보다 향리(鄕里)의 전원생활을 동경했다. 때문에 벼슬에 있는 중에도 집 근처에 사슴을 매어놓아 언제든 그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향리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 ||
역사정보 | 1690 출생 1753 사망 | ||
시대분류 | 조선/1690~1753 | ||
주제분류 | 문화/인물/기타 | ||
지번주소 | |||
도로명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 ||
지역 | 서울특별시 중구 | ||
시작일(발생일) | |||
인물 | 1690년~1753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