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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158 / 나홍좌
* 명칭 나홍좌 이명칭
개요 나홍좌(羅弘佐, 1649~1709)는 조선 후기의 무인으로,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제백(濟伯)이다. 남산동 나대장골에 살았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으로 무과에 응시해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어 치안유지에 힘썼다. 포도대장으로 지낼 때 발생한 과옥(科獄)사건을 안치(按治)하는 과정에서 유배를 당했지만, 장수로서 군사들을 잘 다스리고 맡은 일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명 나홍좌(羅弘佐, 1649~1709)는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었으나 무예를 닦아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을 비롯하여 총부도사(摠部都寺)·훈련원정(訓鍊院正)을 거쳐 1685년(숙종 11)에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었다. 그 뒤 승진을 거듭하여 1699년(숙종 25)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거쳐 한성부 좌윤(左尹)에 임명되고 이듬해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었다. 나홍좌는 장수로 있을 때 위엄과 자혜를 병행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고, 엄하게 기율을 다스렸다. 청탁을 받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의 능력만 보고 부하를 임명하였으며 군사의 육성와 군량의 저축에 전념했다. 그가 포도대장이 된 후에 과거(科擧)의 부정(不正)으로 인한 과옥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마침 어떤 시관(試官)의 부정을 고발한 이가 있었다. 하지만 포도대장 나홍좌가 고발내용을 기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하여 파직 당했다. 이에 1701년(숙종 27)에 숙종이 직접 유배형을 내려 용천(龍川, 평안북도 용천군)에 유배됐다. 1703년(숙종 29)에 김창집(金昌集) 등 대신들의 변론을 통해 풀려나와 이후 수원방어사(水原防禦使)에 부임하였으나 곧 사직했다. 나홍좌는 남산동1가 2번지에 살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남산초등학교가 있다. 이 부근의 마을을 흔히들 ‘나대장골’이라 불러왔는데 이는 나홍좌 대장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줄여서 나동(羅洞)으로 쓰기도 했다.
역사정보 1649 출생 1709 사망
시대분류 조선/1649~1709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649년~17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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