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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상세
관리정보 JGH_001155 / 김도산
* 명칭 김도산 이명칭 김영근(金鎭學)
개요 김도산(金陶山, 1891~1922)은 충무로 초동에서 출생한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이자 영화작가이다. 혁신단·개량단·신극좌를 만들어 연극 활동에 전념하다가 1918년 일본의 연쇄활동사진인 〈선장의 처〉를 보고,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연쇄활동사진극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를 제작했다. 1922년 최초의 활극영화를 시도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그해 12월 사망했다.
설명 김도산(金陶山, 1891~1922)은 충무로 초동에서 출생한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이자 영화작가로 본명은 김영근(金鎭學)이다. 그는 1919년 한국영화 부재의 불모지에서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를 들고 일어섰다. 이 영화는 35㎜ 흑백 1권 분량의 연쇄활동사진극으로 한국 영화사에 있어 최초로 기록되는 영화이자 효시(嚆矢)이다. 영화제작자이던 박승필(朴承弼, 1875~1932)과 더불어 연쇄활동사진극을 개척한 김도산은 신문화 연극 영화운동의 선구자였으며, 영화 기획·연출·각색자인 동시에 연기자이기도 했다. 김도산은 상동(尙洞) 예배당 안에 있던 상동학교를 나와, 일찍이 연극에 뜻을 두고 신극운동의 선구자인 이인직(李人稙) 밑에서 신극에 참여하였다. 이인직의 원각사(圓覺社,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에서 활약하던 중 이곳이 폐관되자 1911년 임성구, 김소량, 박창한, 임인구 등과 함께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남대문 밖 어성좌와 단성사 등에서 무대 공연을 했다. 이어 1914년에는 김소량 등과 협력하여 창극배우들과 신파배우들을 규합한 신파극단(新派劇團) 개량단(改良團)을 만들었다. 개량단은 유일단(唯一團, 1912~1914년까지 활동한 신파극단), 예성좌(藝星座, 1916년 3~12월까지 활동한 신파극단), 연미단(演美團) 계통에서 활약했던 신진들이 대거 집결했고, 특히 한국 신극사상 최초의 여배우인 김소진(金小珍)이 들어 있어 이채를 띠었다. 이들은 김도산을 단장으로 단성사에서 주로 공연하다가 단성사가 영화상설관으로 개축되자 지방순회공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1917년 개량단에서 나온 김소량이 취성좌(聚星座, 신파극 초창기에 대중연극을 주도하였던 신파극단)를 새로 구성하면서 배우조합을 만들자 김도산은 다시 신극좌(新劇座)를 설립했다. 연기자로는 이경환, 변기종, 나효진, 서재원, 이원규, 김영덕, 한길형, 홍연현 등 사회의 저명한 진용으로 짜여 있었으며, 〈호수〉, 〈혈투〉, 〈흑지주〉등을 지방 공연하였다. 이처럼 연극에 전념하고 있던 김도산은 1918년 황금좌(黃金座)의 창립 2주년 기념 공연을 위해 초청되어 온 일본 세토나이카이극단[瀨戶內海劇團]의 연쇄활동사진인 〈선장의 처〉를 보게 된다. 이것을 보고 자극을 받은 그는 단성사의 주인이던 박승필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활동사진연쇄극 〈의리적 구투〉를 만들고,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또 이를 시발점으로 〈대우정〉, 〈형사고심〉, 〈의적〉등 네 편의 연쇄활동 사진극과 〈경성 전시의 경〉등 2편의 기록물(다큐멘터리) 필름에 이르기까지 창의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도산은 1922년 활동사진에 가까운 〈국경〉을 각색 및 제작하여 최초의 활극영화를 시도했으나 마지막 장면을 찍기 위해 자동차에서 뛰어내리다가 부상당해 늑골 2개를 잘라내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일설에는 투병 중에 사망했다고 하나 이는 확실하지 않으며, 김도산은 결국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 채 그해 12월 향년 31세로 아깝게 요절했다.
역사정보 1891 충무로 초동에서 출생 1911 임성구, 김소량, 박창한, 임인구 등과 혁신단 조직 1914 김소량 등과 개량단 조직 1917 신극좌 설립 1919 활동사진연쇄극〈의리적 구투〉 제작 및 개봉 1922 활극영화 〈국경〉 제작 중 사망
시대분류 조선~현대/1891~1922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지번주소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시작일(발생일)
인물 1891년~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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